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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해체철학

중앙일보 2001.05.10 00:00 종합 13면 지면보기
서양 철학은 끝났다. 이렇게 외친 사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였고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이상 독일의 실존철학자)였다.





오늘날은 자크 데리다(71.프랑스의 철학자)가 이 종언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과격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의 작업은 '해체론' 혹은 '탈구축' 이라 불린다. 해체론은 서양 철학사 전체를 분해해서 탈(脫)서양적 사유의 지반 위에 재구축하려는 기획이다.





장 뤼크 낭시(Jean-Luc Nancy)와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는 세계적 인맥을 구축한 데리다 군단(軍團)의 용장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점차 독창적인 철학자로 인정받게 된 2세대의 대표적 해체론자다. 특히 정치철학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에서 해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을 여는 첫 구절은 도(道)를 언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해체론자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도 언어 초월적 사태를 개념적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작업은 서양 철학사 전체에 대한 전복(顚覆)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태도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 전체의 기본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유에서 개념적 언어에 담기지 않는 것은 미신적이고 신비한 것,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한 것이 개념적 질서의 뿌리 아닐까□ 해체론자가 되풀이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가 강조하는 언어 초월적 사태는 무엇보다 정치성(政治性)이다. 이 정치성은 이론적 차원이나 경험적 차원의 정치와 구분된다. 정치를 있게 하는 정치성, 살아 있는 정치성은 일단 '이것이다' 라고 규정하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대신 거기에는 박제화한 정치성이 남는다. 물론 그렇게 해야 정치적 담론이나 실천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담론과 규칙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신선한 기운을 포기한 통조림 깡통에 불과하다. 해체론자의 눈에는 서양 사상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정치 이론은 이런 통조림만 생산해왔다.





그리고 그런 제조 공정의 기초 시설을 제공하고 보호해 온 것이 필로소피아라는 이름의 철학, 이론적 사유의 종손(宗孫)인 철학이다.





니체 이래 해체론자들은 이런 철학이 끝났다고 본다. 이는 철학이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실현하는 가운데 완성되었다는 것을,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철학적 사유는 오늘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로, 사회 제도로 실현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다시 말한다. 철학은 정치를 통하여 세상과 일상을 점령했다. 정치적인 것은 생활 속에 일반화되었지만 의미를 결여한 정치, 공허한 정치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철학과 정치의 상호 공속성(共屬性)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완성으로서의 끝에 도달한 정치를 전체주의라 부른다. 전체주의 사회는 초월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사회, 총체적으로 표준화되고 동질화된 사회, 따라서 폐쇄성이 강한 사회이다.





이런 의미의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유럽 사회도 역시 이미 일상의 차원에서 혹은 미시적 차원에서 전체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스트라스부르 철학자들의 진단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박제화하는 동시에 전체주의화하는 정치 안으로 초월적 정치성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이들이 예술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은 이런 문맥을 배후로 한다. 사실 예술적 전통에는 이론적인 것과 경쟁하는 전혀 다른 정치의 가능성이 꿈틀댄다. 서양사상사의 전통이 플라톤에서 확립됐다면, 그의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에 있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철인(哲人) 왕' 의 이념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리스에서 교양세계의 주인이자 정치의 기본 규칙을 제공하던 주역은 시인들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은 시인들이 누리던 권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후 시적 사유 안에서 정치적 실천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이론적 사유가 승승장구하자 그 속에서 망각되었다. 다만 초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상되었을 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이 낭만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전통이 대변하는 예술적 정치학도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지닌다.





이것은 나치가 어떤 심미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였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반추해 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했고 또 실망한 것도 그가 시적 사유의 옹호자였다는 것에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예술적 정치성을 옹호하되 우상제작으로 전락하는 조형적 의지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그에 반하는 초월적 사태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경향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재현(再現)주의' 혹은 '표상(表象)주의' 로 귀결된다. 재현주의는 개체의 지위를 절대화한 형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상(模像)' 으로 규정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형상을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은 조형적 의지의 속성이다.





따라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철학과 예술론은 다시 존재론적 탐색으로 이어진다. 조형적 의지를 포괄하되 그것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 사유, 탈표상적이고 탈재현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때만 그들이 의도한 새로운 정치가 납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상환 서울대교수.철학





<공동 약력>





▶1940년 모두 프랑스 출생.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과에서 교수로 함께 재직했으며 현재 미 UC버클리 초빙교수로 있음.





▶1980~84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설치된 정치철학연구소 공동 소장으로 활동.





▶라쿠라바르트는 세계적인 학술잡지 『포에티크』의 편집에 참여.





<관련저작.미번역서>





◇ 공동 저작





▶문학적 절대성(1978):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문학이론과 철학을 다룬 고전적 저서.





▶문자의 지위(73):라캉에 대한 해체론적 해석.





▶나치의 신화(91):나치의 출현을 게르만 민족의 정체성을 고안해 내려한 조형적 의지의 산물로 해석.





◇ 공동 편집





▶인간의 종언(81):80년 데리다 사상을 주제로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집.





▶정치성 재고(81):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들에 대한 1차 편집서.





▶정치성의 후퇴(83):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된 논문들에 대한 2차 편집서.





◇ 낭시의 저서





▶에고 숨(79):데카르트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무위의 공동체(83):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공동체 개념을 비판하고 차이의 정치학을 제시하는 명저.





▶자유의 체험(88):근대 철학에서 철학과 정치를 동시에 떠받쳐 왔던 자유의 개념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중후한 저서.





◇ 라쿠라바르트의 저서





▶철학의 주체, 도상적 유형학1(79):문학과 철학의 대립적 관계 안에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





▶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86):근대적 미메시스(모방) 개념이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효과를 띄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비구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





▶정치성의 허구화(87):하이데거의 나치참여 이유를 그의 심미적 정치학에서 찾고,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








<용어 해설>





▶해체론과 탈구축〓파괴와 구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해체론은 플라톤이래 확립된 서양사상사의 본질적 유래와 내재적 한계, 그리고 그 한계 안의 공간이 형성되는 역설적 논리를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탈(脫)서양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정치성〓정치성(the political)은 정치(the politics)와 구분된다. 정치는 개념.이론.제도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반면 정치성은 정치가 있기 위하여 먼저 있어야 하는 사태이되 정치의 개념이나 제도 안에서 망각되는 초월적 사태이다.





▶조형적 의지〓우상적 형상을 만들어 내려는 의지다. 이질적 것들을 하나로 묶고 거기에서 동질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 도형이나 형상을 고안해 내야한다. 서양사상사는 이런 우상제작의 역사였다.





▶초월성〓우상적 형상이 지배하는 표상을 뛰어넘는 사태다. 이는 곧 이론중심적인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태이고, 정치성은 그런 초월적 사태에 속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초월성의 망각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재현주의와 표상주의〓어떤 인위적인 형상(원본)을 정해놓고 이를 절대화하며 개체의 지위 또한 그 신화화 원본과 '복사품' 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사의 중심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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