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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8) 피로 물든 유학산

중앙일보 2010.03.18 01:43 종합 10면 지면보기
동양에서 학(鶴)은 고고(孤高)함의 상징이다. 옛 문인들은 늘 학을 벗 삼으려 노력했고, 그를 통해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 학이 노닐었다는 산이 대구 북방에 동서로 뻗어 있는 해발 839m의 유학산(遊鶴山)이다. 그러나 1950년 8월의 유학산은 학이 날아다니는 그런 멋진 곳이 아니었다. 동족끼리 맞붙어 처절하게 피를 흘리면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소대장들은 신병 명단을 화랑 담뱃갑에 썼다
격전 뒤면 피와 땀에 절어 알아볼 수 없는 이름들 …
젊은 그들은 그렇게, 무명의 용사로 사라져 갔다

동서로 4㎞를 뻗은 유학산은 서남쪽으로 칠곡군 석적면, 서북쪽으로는 구미시 구평동과 경계를 이룬다. 쉽게 말하자면, 유학산은 대구를 지키는 관문이다.



아군이 지킨다면 주변의 모든 도로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을 선점해 적의 기계화부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이다. 그 반대로 적이 이곳을 점령해 공격한다면 아군 보병부대의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곳이다. 대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먼저 차지하고 지켜야 한다.



1950년 8월 다부동 인근의 유학산과 수암산을 비롯한 산에서는 처절한 고지 쟁탈전이 밤낮 없이 벌어졌다. 산과 계곡에는 아군과 적군의 전사자가 쌓여 갔다. 미군들도 자신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산악전을 힘겹게 수행해야 했다. 미군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구축한 진지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우리 국군 1사단의 방어 전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전담했던 12연대가 이 유학산에서 혈투를 벌였다. 1950년 8월 17일부터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들은 날이 밝으면 공격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또 공격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12연대는 적이 먼저 고지에 오른 이 유학산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식의 공세(攻勢)를 벌여야 했다. 고지를 선점한 적은 우리보다는 훨씬 유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유학산 남사면(南斜面)은 매우 가파르다. 그에 비해 적들이 올라오는 북사면(北斜面)은 이보다 훨씬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고지에 오르기 위한 길의 평이함에서도 적은 우리보다 유리했다. 더구나 남쪽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은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쉬웠지만 그 이상은 험준한 암벽이었다. 몇 안 되는 등산로를 통하더라도 마지막에는 50~70m의 가파른 암벽을 올라야 했다.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고지를 빼앗으려는 12연대 장병의 큰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8월 13일 이후 유학산에서 격전이 벌어지면서 병력 손실이 계속 발생했다. 그를 보충하기 위한 추가 병력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을 올려보내는 일은 통상 밤 10시30분을 지나서 시작, 11시30분쯤 마쳤다. 새 병력이 도착하면 소대장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서 “내가 소대장 아무개”라고 소개한 뒤 중학교 졸업자 이상인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해 분대장에 임명하는 식으로 공격 진형(陣形)을 갖췄다고 한다.



소대장들은 화랑담배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적어 간직했다. 소대장은 또 분대 단위로 대원들이 서로 성명을 확인하게 한 뒤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동이 트면 시작하는 공격에 이들 분대원이 앞장을 섰다. 아침 전투에서 지난밤에 보충된 신병의 80~90%가 사라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의 화랑담배 껍질은, 그러나 없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설령 없어지지 않더라도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던 소대장의 땀과 피로 얼룩져 전선에서 죽어간 신병들의 이름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무명(無名) 용사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12연대 1대대의 공격 목표는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였다. 그곳에 이를 수 있는 능선은 3~4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지를 눈앞에 두고 멈춰 서게 되는 곳은 70m 이상의 암벽이 버티고 있는 지점이었다. 적으로부터 수류탄이 날아오면 피할 곳도 없었다.



3개 분대씩 일렬 종대로 목표에 다가가다가 적이 수류탄과 박격포로 공격하면 1개 분대가 그 자리에서 희생을 당한다.



그러면 다시 뒤의 분대가 앞으로 나가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3개 중대 병력을 모두 합해도 10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병력 손실이 생겨났다.



모든 고지가 그랬다. 다부동 싸움의 모든 전장(戰場)도 그랬다. 이런 때에 과감하게 나선 사람들이 노무자였다. 병사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노무자들은 조국과 민족, 그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이들은 깊은 밤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아군이 있는 능선까지 접근해 탄약과 보급품을 날랐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 또한 아주 컸다. 1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유학산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다부동의 유학산 전투에서 아군이 결코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에는 1사단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 갔다. 새로 전쟁터에 투입된 신병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 그만 겁부터 집어먹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물처럼 흘렀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피는 하천을 이루는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참혹한 정경이 나의 눈앞, 저 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유학산은 이렇게 내 전우들의 피와 육신을 삼켰다. 그 무덥던 1950년의 여름날, 밤과 낮 구별 없이 벌어지는 전투의 현장에서 내 부하들은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내가 있던 사단, 그리고 그 예하의 각 연대에서는 사정없이 ‘고지 탈환’의 명령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득달같이 진지로 날아오는 공격명령을 받아들고 그들은 싸움터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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