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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일본인 빼고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야만적 ‘태형령’ 공포

중앙일보 2010.03.18 00:34 종합 33면 지면보기
일제가 ‘조선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제작, 유포한 사진 엽서. 일제는 연출한 장면을 담은 이런 사진 엽서들을 다량 배포해 조선의 ‘야만성’을 내외에 알리는데 열중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법치의 이름으로 은밀한 장소에서 더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제1조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할 자는 태형(笞刑)에 처할 수 있다. 제4조 벌금이나 과료를 태형으로 바꾼 경우에는 1일 또는 1원을 태 한 대로 친다. 1원 미만의 것은 한 대로 계산한다. 단, 태는 다섯 대 미만이 될 수 없다. 제11조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히 집행한다. 제13조 본령은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한다.’



1912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는 ‘조선태형령’을 제정, 공포했다. 일제는 이에 앞서 ‘범죄즉결령’을 공포해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태형은 정식 재판 없이 헌병대장이나 경찰서장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법률은 총독부의 공적(公的)인 처벌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일제 경찰의 사적(私的)인 보복 수단이기도 했다. 야만적 폭력이 ‘문명적 법치’의 이름 아래 횡행했다. 함께 제정된 ‘경찰범처벌규칙’은 ‘일정한 주거나 생업 없이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자’ ‘함부로 남 앞을 막아서거나 따라다니는 자’ ‘관서의 독촉을 받고도 굴뚝의 개조, 수선 혹은 소제를 소홀히 한 자’ 등 경찰의 눈 밖에 난 자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태형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총독부는 그해 말, 집행자의 사감(私感)이 작용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 다시 ‘태형집행심득’을 제정했다. ‘제1조 태형은 수형자를 형판 위에 엎드리게 하고 양팔을 좌우로 벌리게 하여 형판에 묶고 양다리도 같이 묶은 후 볼기 부분을 노출시켜 태로 친다. 제11조 형장에 물을 준비해 수시로 수형자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게 한다. 제12조 수형자가 비명을 지를 우려가 있을 때에는 물에 적신 천으로 입을 막는다.’ 다소 완화된 야만성이 이 정도였으니, 그 전의 태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인류가 처음 법을 만들 당시에 ‘벌’은 ‘죄’에 대한 보복일 뿐이었다. 피해자가 사적(私的)으로 복수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형벌’이란 ‘국가가 피해자와 그 친족을 대신해 복수하는 것’이었다. 함무라비 법전도 ‘8조법금’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관념을 담고 있었다. 범죄가 개인의 비정상성 또는 일탈의 결과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은 근대 이후였다. 더불어 형벌도 ‘보복’이 아니라 ‘교정’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천 년 된 관념이 단박에 바뀌는 법은 없다. 지금도 ‘죄와 벌’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이 힘을 겨루고 있으니 감옥이 ‘교도소’가 되었다가 ‘형무소’가 되었다가 한 것이나 사형(死刑) 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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