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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다 버린 CEO, 직원들 마음을 얻다

중앙일보 2010.03.17 02:36 경제 2면 지면보기
위기는 기업의 이름이나 번지수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고 합니다. 많은 기업이 주저앉지만, 바닥에서 탈출해 재기에 성공하는 곳도 있습니다. 여느 기업이라면 쓰러졌을 호된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을 계속하며 일자리를 늘리는 ‘턴어라운드’ 기업들입니다. 본지는 ‘턴어라운드’ 기업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는지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힘의 원천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았는지, 최고경영자의 육성을 통해 담아내겠습니다. 또 이들의 성장성에 대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분석도 곁들입니다.


위기 딛고 선 기업들 <2> 팬택

이런 기업은 없었다. 이런 주주·채권단도 없었다. 2007년 4월 워크아웃을 시작한 다음 분기부터 곧바로 영업흑자를 내더니, 지난해 4분기까지 10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한 팬택 얘기다. 지난 12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박병엽(48) 부회장은 1억6400만 주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턴어라운드(실적 개선)를 잘 이끌어 왔으니 앞으로도 잘 해보라는 일종의 ‘당근’이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5일 서울 상암동 팬택 본사 19층 집무실에서 만난 박 부회장은 “3년간 이를 악물고 뛰어서인지, 어금니가 너무 아파 방금 치과에 갔다 왔다”고 반쯤 엄살부터 부렸다. “주름이 늘었다”는 기자 얘기에 “한때 실패했다고 그대로 주저앉았으면 백발 노인이 됐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포기하지 않고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다는 기대로 매일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은 29세였던 1991년 33㎡(10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4000만원으로 무선호출기 회사를 세웠다. 14년 만에 직원 4500여 명, 매출 4조원대를 넘나드는 휴대전화 제조회사를 일궜다. 2001년 현대큐리텔, 2005년 SK텔레텍을 인수해 팬택을 국내 2위의 휴대전화 업체로 키웠다.



하지만 뒤이어 글로벌 메이저 업체들과의 정면 승부에 나선 게 화근이 됐다. 중국 등 해외시장에서 팬택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각종 마케팅 비용 등으로 2000억원 이상을 투입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여기에 내수 침체로 국내 휴대전화 시장까지 침체됐다. 이로 인해 2006년 한 해에만 4000억원 가까운 적자를 냈다. 과욕이 부른 화였다. 업계에서는 “박병엽 신화는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 급기야 그해 말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신청했고 이듬해 4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박 부회장은 4000억원대에 달한 자신의 주식을 모두 채권단에 넘겼다. 백의종군이었다. 그는 워크아웃을 시작하면서 ‘픽스 앤 맥스(Fix & Max)’라는 전략을 수립했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안정적 수익창출로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위기를 부른 ‘덩치 불리기’를 버리고 ‘효율성’에 집중한 것이다.



마구잡이식으로 공략하던 해외시장은 미국·일본·멕시코 등 몇몇 나라 중심으로 정리했다. 어떻게든 독자 브랜드를 키우려던 예전의 방침도 버렸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선진국 이동통신사에 주력 모델을 공급하면서 실속을 챙겼다. 김태협 생산본부장(상무)은 “경기도 김포의 팬택 공장의 생산성은 워크아웃을 시작할 때에 비해 40% 이상 높아졌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세계적 단말기 칩 업체인 퀄컴과 기술료 담판을 지었다. 퀄컴은 팬택에서 받을 로열티를 출자전환 방식으로 지분 투자하는, 이례적 결정을 내렸다. 알토란 같은 현금을 쏙쏙 빼내가던, 기술료 지출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퀄컴도 턴어라운드를 인정했다’는 평판까지 얻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팬택은 지난해 매출 2조1320억원에 영업이익 1487억원의 실적을 올렸다. 매출은 워크아웃 이전인 2006년(2조6307억원)보다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3357억원 적자에서 크게 개선됐다. ‘외형’보다 ‘실속’을 중시한 전략이 실적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런 결실에 대해 박 부회장은 “직원과의 소통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박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직급을 따지지 말고 아이디어가 있으면 내게 e-메일이나 전화로 알려달라”고 주문했다. 가급적 많은 아이디어를 최대한 빨리 접해 턴어라운드에 활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박 부회장은 아이디어 채택 여부에 관계 없이 e-메일 제안에 대해 일일이 응답 메일을 보낸다고 한다. 직원들의 생각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출장기간을 빼면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회사에서 지냈다. 일요일엔 출근한 직원들과 함께 중국음식을 시켜 먹을 때가 많았다. 오전 5시30분이면 회사에 나오는 CEO를 보며 직원들도 각오를 다졌다. 팬택 신입사원들 사이에서는 “사표 쓰는 법부터 배우고,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니자”는 말이 오간다고 한다. 일이 너무 고되어서 견디기 힘들면 언제라도 회사를 떠나라는 박 부회장의 단호한 생각 때문이다.



16일 서울 상암동 팬택 빌딩 20층 연구개발(R&D)센터에서 이 회사 디자인기획팀원들이 내년도 휴대전화의 디자인 트렌드를 논의하고 있다. 앞으로 휴대전화의 외부디자인과 소재가 어떻게 변할지에 관해 열띤 토의를 벌였다. [강정현 기자]
팬택은 2013년 매출 5조원 달성을 목표로 잡았다. 올해는 휴대전화 1250만 대를 팔아 매출 2조1000억원, 영업이익 784억원을 올리는 것이 목표다. 지난해 실적보다 오히려 낮춰 잡았다. 박 부회장은 “다음 달에 회사의 첫 스마트폰을 출시하면 물량 싸움도 중요하지만 기술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더 큰 도약 직전의 움츠림이라고나 할까, 올해는 ‘기술’에 치중해 더 큰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판매 목표는 보수적으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글=문병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워크아웃(Work-out)=기업의 경영 악화로 도산위기에 처할 때 이를 피하기 위해 채무자와 채권자가 택하는 해결 방법의 하나. 채권 상환 유예를 통한 부도의 유예 조치와 협조 융자, 출자 전환을 포함한다. 기존 경영진·주주·종업원의 손실 분담이 전제된다.




팬택의 부침



1991년 3월 ㈜팬택 설립



92년 4월 무선호출기 내수판매·수출 개시



97년 5월 CDMA 이동전화 단말기 생산



2001년 11월 현대큐리텔 인수



2002년 8월 현대큐리텔, ㈜팬택앤큐리텔로 사명 변경



2005년 7월 SK텔레텍 인수, ‘스카이’ 내수판매 개시



8월 SK텔레텍, 스카이텔레텍으로 상호 변경



12월 ㈜팬택, 스카이텔레텍 합병



2006년 12월 채권단, 워크아웃 개시 합의



2007년 4월 팬택계열 워크아웃 개시



7월 채권단 1차 출자전환 완료



2009년 8월 퀄컴과 출자전환 계약 체결



9월 채권단 2차 출자전환 완료(팬택)



12월 팬택과 팬택앤큐리텔 합병



2010년 3월 주총에서 박병엽 부회장에게 스톡옵션 부여



2011년 12월 워크아웃 졸업(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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