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 산책] 움트는 그리움의 계절, 3월

중앙일보 2010.03.13 00:26 종합 33면 지면보기
여행이란 길을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계절은 돌고 돌아 또 봄의 햇살 위를 거닐고 있습니다.



봄의 햇살 위로 움터오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는 3월을 천주교에서는 요셉 성인의 달로 보냅니다. 매월 국가에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나 민족지사들을 지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요셉 성인을 기리는 3월이면 마음이 아려옵니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처럼, 함께했으나 잊혀져 가는 이름처럼 그렇게 아릿한 기억으로만 자리하는 분이 요셉 성인이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차라리 눈 돌리고 싶은 현실이기도 합니다.



요셉 성인은 알다시피 예수님의 아버지였고 성모님의 남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목수였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돌아가셨는지조차 불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양부로서는 존경을 받았지만 성모님에 비하면 그리 많이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삶은 그리 평탄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비였으나 자신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는 예수님과 아내였으나 아내라 말할 수 없는 성모님과 짧은 생을 살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림=김회룡 기자]
언젠가 성모님을 잘 그리는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오는데, 아버지의 모습은 불분명하게 다가오느냐고 말입니다. 화가의 답이 솔직히 마음에 그려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지도 않고 여자라서 그런지 쉽게 와 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은 비단 화가만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어머니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리움의 별이 되지만 아버지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허공을 가르는 바람과 같은 존재로 자리한다는 느낌만이 들 뿐이니 말입니다. 존재하고 느낄 수 있지만 담을 수 없는 바람처럼 볼 수도 만질 수도 선명하게 그려지지도 않는 존재…. 그래서인지 아버지라는 이름은 언제부터인가 안쓰럽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기억되지도, 그리움의 별도 되지 못하면서 연신 빈 그물만 걷어올리는 어부와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이 땅의 가장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내몰립니다. 자신의 삶이 용병으로 고용된 것도 아닐 텐데 용병 아닌 용병처럼 겉도는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입니다. 그 숱한 상처에 시린 소주를 부어가며 안주 삼는 위안이라는 것이 약육강식이라는 해묵은 논리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조차 강한 자들의 자기 변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스키모가 순록을 사냥할 때 암컷이 아니라 수컷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암컷은 새끼를 가지고 있을 수 있기에 수컷만을 사냥감으로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지혜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천성이든 아니면 어리석은 삶의 방식이었든 힘 자랑에, 제압하거나 지배하는 데만 익숙해져, 함께 사는 데는 너무나 취약함(?)을 드러낸 것이 지난 남성의 세계였으니 말입니다. 업적을 쌓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약하고, 가부장적인 삶으로 수직관계에는 예민하지만 함께하는 수평적 관계에는 언제나 서툰 모습이 이 땅의 남성, 가장들의 현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남성의 모습과 다른 분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올해 3월은 이 땅에 살았던 한 남자(?)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이 솟구쳐 오릅니다. 큰 어른, 영적인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신 고 김수환 추기경님 때문입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떠)난 자리는 표난다는 말처럼 그분의 자리가 새삼 그리워지는 까닭은 단지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한 고달픔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한 남자로서의 삶을 성찰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종파를 떠나 그분을 추모했던 이유도 그럴 겁니다. 이 땅에 태어난 남자로서 꽃보다 아름답게 자리할 수 있는 길을 그분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계절을 따라 운행하는 것이 별들의 운명이라면 북극성은 분명 그 운명을 거스른 별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기에 다른 별들은 그들의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북극성처럼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때 우리 마음이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희망을 보여주셨기에 그분을 향한 그리움도 쉬이 그 자리를 떨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 선종 1주기를 맞이하며 천주교에서 추모행사(2.21~3.28)를 펼치는 이유입니다.



가끔씩 요셉 성인의 삶이 이 땅에 살아가야 할 남자들의, 아니 가장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어 씁쓸했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총구에 자신이 맞추어져 있는 것도 모른 채 풀을 뜯고 있는 수 순록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아니 요셉 성인의 삶이 오늘을 사는 가장들의 운명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슬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누군가의 엄마이고 아내여서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듯 아버지는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빠이기에 기억되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움의 별이 되는 것은 비록 허공을 가로질러 스치는 인연의 끝자락을 어루만지는 삶이라 할지라도 근본에 대한 성찰과 영원을 향한 목마름을 간직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해서 오늘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용병 아닌 용병의 역할에 자신의 운명을 내어 맡기려는 많은 가장들에게 바람이기보다 영원을 향한 순례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지라도 영원을 담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고를 마치고 보내려 하는데,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존경했던 분이었고 그분 글을 많이 보아 온 터라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또 한 분의 큰 어른을 잃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더 심란해지는 3월입니다.



권철호 삼각지성당 주임신부

그림=김회룡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