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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한국 기업, 초심을 잃지 말라

중앙일보 2010.03.13 00:24 종합 34면 지면보기
‘제니스 트랜스 오셔닉.’ 1950년대 미국 제니스사의 진공관 라디오다. 암시장에서 쌀 50가마를 줘도 구하기 어려웠다. 이 물건 하나면 서울 장안에서 말발깨나 섰다. 도쿄는 물론 멀리 하와이에서 쏘아 보내는 전파까지 잡아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 찬양 일색인 국내 방송에선 들을 수 없었던 물 건너 세상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설의 제니스는 95년 LG전자의 자회사가 됐다. LG전자는 미국 시장에서조차 더 이상 제니스란 브랜드를 쓰지 않는다. 드럼세탁기·시스템 에어컨 같은 첨단제품 이미지와 맞지 않아서다. 요즘 미국 세탁기·에어컨 매장에선 LG전자가 늘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한다.



가전사업에 뒤늦게 뛰어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2004년 승부수를 던졌다. 반도체 기술자 100여 명을 TV사업부에 투입했다. 거기서 평면TV ‘보르도’가 나왔다. 색상 조절을 하는 반도체 칩을 세계 처음 내장한 TV였다. 삼성전자는 보르도를 앞세워 2006년 세계 평면TV 시장 1위에 올랐다.



지난해 미국에선 발광다이오드(LED) TV로 다시 한번 시장을 평정했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미국 LED TV 시장점유율은 86%였다.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3D(3차원) TV 신제품을 발표하려 하자 경쟁사인 파나소닉·소니가 한발 앞서 물타기에 나선 것도 지난해의 뼈아픈 기억 때문이다.



77년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미국에 처음 상륙했을 때 미국인은 적지 않게 놀랐다. 이름도 생소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자동차를 만든 것도 신기했지만 가격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는 싼 맛에 타는 차로 통했다. 반전은 ‘10년·10만 마일’ 보증 수리 캠페인을 들고나온 98년 시작됐다. 현대차는 더 이상 미국 시장에서 싸구려가 아니다.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인 수퍼보울과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방송에서도 현대·기아차 광고가 바람몰이를 했다.



요즘 미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활약이 눈부실 정도다. 금융위기로 내로라 하는 글로벌 기업이 죄다 맥을 못 추는 와중이어서 더 빛난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약진을 보면서 한편 불안한 생각도 든다. 80~90년대 일본 소니·도요타를 보는 듯해서다. 소니·도요타가 일본이란 울타리를 넘어 세계시장을 제패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그러면서 조직은 성공신화에 취했다. ‘우리는 세계 최고’라는 오만이 싹텄다. 최고경영자의 주변에서 쓴소리 하는 사람이 하나 둘 사라졌다. 소비자 목소리는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에 묻혔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도요타 사태만 봐도 그렇다. 이미 수년 전부터 일본 국내에서 쏟아진 소비자 불만에만 귀를 기울였더라도 800만 대 리콜이란 재앙은 피할 수 있었다. 한국 기업이 도요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꼭 하나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굳게 닫힌 소비자의 마음을 열고자 백방으로 뛰었던 시장 개척 초기의 초심(初心) 말이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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