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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이념 없는 사회, 신념 없는 개인

중앙일보 2010.03.13 00:18 종합 35면 지면보기
요사이 부쩍 TV나 신문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가 있다. 이념 논쟁, 이념 초월, 이념 분열, 이념 잣대…. 언론사나 노조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이념’에 관한 논쟁이 한창인 듯싶다. 꽃피는 춘삼월이건만 아직 우리 곁을 떠날 줄 모르는 동장군같이, ‘이념’이란 단어는 국민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긍정적인 의미로 ‘이념’을 언급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인지 언론에서 자주 보고 들음에도 불구하고 친근감이 생기기는커녕 심리적 거리감만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대통령은 3·1절 기념 축사에서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지양하고 민생 향상을 위해 생산적인 실천방법을 찾는 중도실용주의를 강조했고, 야당 대표는 “진보·보수 좌우의 이념논쟁을 초월해 국민들에게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라면 과감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월례회의에서는 정치권을 향해 “이념 대결의 소모적인 논쟁을 넘어 정책 대결에 나서 달라”는 주문이 나왔다. 얼마 전에는 정치적·이념적 투쟁을 접고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단체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탈(脫)이념’을 주장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이념 논쟁, 투쟁, 갈등에 대해 국민들이 식상해 하고 짜증내고 있다고 생각한 정치인들이 현실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태도와 무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외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혹은, 하나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어떤 주장이 다른 견해와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 사회 발전에 무익하거나 위해가 된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떠한 근거로 ‘탈이념’을 주장하든 그 내용에 동의하기 힘들다.



이념을 기반으로 한 논쟁과 그로 인해 유발된 갈등, 그리고 해결 등 일련의 과정 자체를 국민들이 식상해 하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바로 ‘정치’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국가의 앞날에 영향을 줄 정책 결정에 있어, 그 타당성이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없이 선무당이 사람 잡듯 얼렁뚱땅 결정함으로써 야기될 손해를 반길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국민들이 혐오하는 것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분노와 공격성 같은 집단정서를 교묘히 이념과 정책으로 포장하는 정치행위다. 서로 앙숙으로 유명한 정치인들이 겉으로는 소속 정당의 이념을 주장하는 듯싶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적 분노, 좌절 그리고 공격성이 숨겨져 있는 경우를 TV 토론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논제에 대한 찬성·반대가 너무나 분명해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토론 내내 자신의 생각만을 되풀이하는 이념주의자들이 싫을 뿐이다.



이념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타인과 어울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 세상과 사회가 어떤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적절한지, 또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으며 공존할지 등에 관해 개개인이 갖는 신념과 가치관을 조합한 것이 한 사회의 이념이다. 의식을 하든 못 하든 일상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과 행동은 개인의 생각과 판단을 기초로 하는 것이며, 한 사회의 정책과 제도에는 이념이 배태(胚胎)되어 있다. 즉, 신념이나 이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질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이념논쟁이 빈번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이 문제라기보다는, 이념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의견이 문제다. 즉, 합리성과 이성적 판단을 가장한 사이비 이념과, 진보와 보수 혹은 좌와 우의 대립 구조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을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는 흑백이념이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진 교육감 후보의 정치 성향에 대한 보도가 어떻게 그들의 교육철학과 이념, 그리고 정책을 소개하는 것보다 앞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기사는 후보들의 교육철학의 건전성과 경험자산의 타당성을 근거로 하지 말고, 진보와 보수의 선호로 투표에 임하라는 압력을 주는 것과 다름없다.



‘탈이념’ 주장의 확산을 보며 우리 사회 전체가 자칫 이념이라는 것에 무관심해지고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개인의 욕망과 감성만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갈등과 고민의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는 이 시대적 트렌드를 ‘탈이념논쟁’이 가속화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사회가 본능과 느낌만 판치는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은 건강한 이성과 신념을, 그리고 사회는 성숙한 이념을 가져야 한다. 이념을 외면하거나 이념논쟁을 피하기보다는 건강한 상식과 건전한 이성을 바탕으로 진짜 논쟁이 펼쳐지는 정치의 장(場)을 기대해 본다.



성영신 고려대 교수·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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