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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본드 걸

중앙일보 2010.02.25 19:26 종합 35면 지면보기
신문기자 출신 이언 플레밍이 1953년에 첩보소설을 발표한다. 제목은 ‘카지노 로열’. 여기서 살인면허 007로 불리는 제임스 본드가 등장한다. 플레밍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해군정보부에서 부관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첩보원 활약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007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영화화되면서다. 제1탄이 영국에서 1962년 제작된 ‘살인번호’다. 원제는 ‘닥터 노(Dr. NO)’. 션 코너리가 본드 역을 맡았다. 그는 여섯 차례에 걸쳐 본드 역을 맡는다. 최다 출연은 로저 무어로 일곱 번. 역대 본드는 이들 외에 조지 라젠비, 티머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 대니얼 크레이그까지 6명이다.



007 영화에서 뺄 수 없는 것이 ‘본드 걸’이다. 초대 본드 걸은 ‘허니’로 분한 스위스 출신 우르슐라 안드레스. 이후 대부분 당대의 ‘육체파’ 배우가 출연한다. 20탄 ‘어나더 데이’에 출연한 할리 베리는 연기력까지 갖춰 ‘몬스터 볼’로 2002년 아카데미 주연상까지 받는다. 본드 걸은 국적도 다양한데, 최초의 동양인 본드 걸은 5탄 ‘두 번 산다’에 출연한 일본인 하마 미에다. 18탄 ‘네버 다이’에선 중국인 양자경이 본드 걸을 맡았다.



이처럼 주인공도, 본드 걸도, 자동차도 바뀌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권총이다. 제1탄 ‘닥터 노’에서 M이 007에게 권총을 바꾸라고 한다. 이탈리아제 베레타를 버리고 독일제 발터PPk를 쓰라는 거다. 구경 7.65mm에 7연발이다.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쏜 권총이 이 모델이다. 그러나 007의 상대들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인해전술을 펼치자 권총도 업그레이드된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18탄 ‘네버 다이’에서 선보인 발터P99다. 구경 9mm에 16연발이다. 그런데 최신작인 22탄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대니얼 크레이그는 다시 올드 모델인 발터PPk를 든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본드 걸’로 변신한 김연아에게 세계의 눈이 쏠려 있다. 일본인, 중국인에 이어 한국인 본드 걸이 빙판을 녹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쇼트 프로그램 마지막에서 한 방 날린 ‘손가락 권총’에 관중들은 마치 ‘총 맞은 것처럼’ 숨을 죽였다. 그 한 방에 아사다 마오도, 안도 미키도 그냥 쓰러졌다. 007에서 닥터 노는 심장이 오른쪽에 있어서 가슴에 총을 맞고도 살아났지만, 김연아의 경쟁자들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금메달을 겨냥한 손가락 권총에 오발(誤發)은 없다.



박종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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