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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밴쿠버] ‘저 아이들을 잡으면 1바퀴 잡는거다’ 9년 전 일기처럼

중앙일보 2010.02.25 00:51 종합 28면 지면보기
1만m 결승에서 함께 뛴 반 데 키에프트(네덜란드)를 한 바퀴 추월해 스퍼트하는 이승훈. [밴쿠버 로이터=연합뉴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강철 심장 … 황영조 버금가는 폐활량
지옥 훈련 … 매일 훈련 거리만 5만m
무한 도전 … 쇼트서 전향 7개월 만에 금

이승훈(22·한국체대)이 24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올림픽 신기록(12분58초55)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냈다. 쇼트트랙에서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 지 7개월 만에, 그리고 세 번째 1만m 출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영광의 순간까지는 한계와 시련을 이겨낸 땀과 투지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시상대에서 2위 이반 스코블레프(러시아), 3위 봅 데 용(네덜란드) 선수가 우승자 이승훈을 번쩍 들어올리는 감동적인 장면.[밴쿠버 로이터=연합뉴스]
◆빙판 위 마라토너=경기가 끝나자 은·동메달을 딴 이반 스코블레프(27·러시아)와 봅 데용(34·네덜란드)은 이승훈을 함께 들어올리며 가마를 태웠다. 올림픽에서 전례 없었던 경쟁자들의 축하였다. 그만큼 이승훈은 특별하다. 빙속 장거리는 엄청난 근력이 필요해 스벤 크라머(네덜란드·1m85㎝·80㎏) 같은 근육질의 거구들이 지배한다. 가늘게 빠진 이승훈의 몸매(1m77㎝·72㎏)는 마라톤이나 쇼트트랙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승훈은 탁월한 심폐지구력을 자랑한다. 그는 “중학교 때 폐활량을 측정할 기회가 있었는데, 황영조에 버금간다고 하더라”고 자랑했다.



지난해 6월 한국체대에서 측정한 셔틀런(20m 왕복달리기)에서 그는 159회를 기록했다. 한국체대 남자 빙상부 선수 평균이 140회, 육상 남자 중장거리 선수 평균이 141.65회였다. 강은범 한국체대 체육과학연구소 조교는 “이승훈의 지구력은 마라토너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날 레이스에서 경이적인 지구력을 보였다. 400m별 구간 기록에서 꾸준히 31초 안팎을 기록하더니 마지막 400m에서 최고 스피드인 30초29를 찍었다. 체육과학연구원 윤성원 박사는 “1만m에서는 막판 스퍼트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영리한 체력 안배로 아낀 힘을 마지막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타고난 심장 덕분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매일 10시간 가까운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지상훈련과 스케이팅이 각각 5시간씩이었다. 하루 스케이팅 거리가 마라톤 거리(42.195㎞)보다 긴 5만m. 이승훈은 “체력은 자신 있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저 아이들을 잡으면 한 바퀴 잡는 거다’라고 쓴 이승훈의 2001년 일기.[이호형 기자]
◆“스피드로 올림픽 갈래”=원래 이승훈의 꿈은 축구의 펠레나 호나우두처럼 쇼트트랙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밴쿠버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시련이 찾아왔다. 이승훈은 2009년 4월 열린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첫날 경기에서 1위로 달리다 결승선을 5m 남기고 넘어진 탓이다.



하지만 이승훈은 밝은 얼굴로 “이상해. 이번 올림픽에 무슨 일이 있을 건가 봐. 안 그러면 내가 떨어질 리가 없는데”라고 말했다. 그 모습에 부모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어머니 윤기수씨는 “네가 너무 열심히 해서 잠시 쉬라고 그런가 보다”라며 아들을 달랬다.



스케이팅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마음껏 쉬었지만 올림픽의 꿈을 버리지는 못했다. 몇 달 뒤 이승훈은 윤씨에게 “엄마, 4년을 못 기다리겠어.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올림픽 갈래. 후보라도 좋아”라고 말했다. 다른 스케이트화와 더 긴 링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밴쿠버 올림픽. 이승훈의 손에서 세계 스피드 스케이팅의 역사가 새로 쓰였다.



글=김식·오명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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