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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4. 전봉준 유적지

중앙일보 2001.01.31 00:00 종합 17면 지면보기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 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김남주(金南柱),지금은 망월동 묘역에 고이 잠들어있는 이 분노의 시인은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1894년,갑오년 내내 동학농민혁명의 ‘총대장’으로 싸움을 지휘하다가 마흔 한 살의 아까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봉준(全琫準).바로 그의 얼굴에 이 추모시를 쓴 김남주의 얼굴이 겹친다.두 사람의 부릅뜬 눈이 무섭다.





그때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운 사람’이 어찌 전봉준 뿐이었으랴.손화중(孫化仲)·김개남(金開南)과 같은 지도자들,아니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 아래 반봉건 반침략의 싸움에 목숨을 받쳤던 수많은 백성들을 함께 기억해야지.





나는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발족 당시 축사를 한 인연으로 94년부터 사업회의 대표를 맡고 있다.처음에는 주변의 권유로 시작했던 일이 내 마음을 끈 것은 ‘제폭구민’이란 그들의 대의명분이다.





힘 없는 백성이 목숨을 걸고 일어선 절박함이 오랜 군사독재의 시절을 지내온 한 지식인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없다.지난 시절 우리가 부르짖던 민주·민생과 다르지 않다.





대표를 맡은 이후 매년 기념사업회 사람들과 함께 혁명군이 밟고 간 황토길을 따라 전적지 답사를 한다.





처음 봉기했던 고부,무장,총 집결지 백산,전주 감영군에 대승을 거둔 황토재,입성 후 화약을 맺고 집강소(執綱所)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었던 전주 등. 그 빛나는 진군과 승리의 현장을 되밟아간다.





일본군의 신병기 앞에 처참한 패배를 남긴 저 공주 우금치,그 통한의 땅에도 농민군 후예들의 발걸음은 미친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못견딘 백성들이 관아를 습격함으로써 농민 봉기는 시작되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런데 그 농민전쟁이야말로 우리 근대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위대한 민중항쟁이라고 책에서 읽었다.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조병갑의 공로도 인정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농사짓던 몸으로 기껏 죽창이나 쇠스랑을 무기 삼아 돌진하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도 이름은 장군이지만,언제 무술을 닦았다거나 무장이 될만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 아니었다.한학을 공부하고 서당 훈장을 지낸 유생이었을 뿐.





그런데도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廣濟蒼生)’의 대의를 살리고자 분연히 일어선 그들의 애국 충정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저 넓은 땅의 푸른 들판을 보라.농민들의 함성과 절규의 저 황토길을 보라.어느 한 곳인들 저항과 혁명의 뜨거운 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는가를...”





전북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쓴 ‘동학농민혁명 100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나는 그 현장에 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한다.





슬프게도 농민군들은 장렬하게 산화했거나 흩어져갔다.잡혀가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우리들이 해마다 찾아가는 그 땅은 그러나 결코 패배의 공간이 아니다.





아니 ‘패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로운 역사의 종말이나 단절은 아니었다.훗날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 활동으로,일제 강점기의 항일 무장투쟁으로,3·1독립운동으로 그 맥락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에랴.





죽은 자는 그 죽음이 남긴 의미와 가르침으로,살아남은 자는 그의 육신을 바친 또 한번의 애국으로 그렇게 이 땅에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길을 트고자 했다.





반봉건 ·반침략을 부르짖은 농민들의 열망은 요즘말로 하자면 개혁.자치.자주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혁명정신이야말로 지금 이 나라의 국가적 과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배의 객체로만 살아온 백성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궐기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실천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농민혁명은 당시에는 물론이고,일제하에서는 ‘동학란’으로 폄하되었을 뿐 아니라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불온한 반란’쯤으로 여겨졌다.아니 지금도 그런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남아있는 듯하다.





1994년 농민혁명 1백주년 기념행사 때 한 기관장에게 축사를 부탁한 적이 있다.그분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주성 입성은 말하자면 제 선임자가 반란군에 쫓기어 도망간 사건인데,어떻게 제가 나가서 축사를 합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정부가 갑오년 당시 백성들의 원한을 산 것과 같은 부패 무능한 정부라면 안나오셔도 좋습니다만,제가 알기로는 국민을 위하여 국정개혁을 하겠다고 하던데….”





그 기관장은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동학농민혁명만세”도 함께 외쳤다.





지금은 전국 14개 지역에 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단체가 있고,학계에도 여러 연구자들이 나와서 농민혁명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져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7일에는 국회의원들의 연구단체인 ‘갑오동학농민혁명연구회’가 발족됐다.갑오년 그때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서울 진격에 실패한 농민군의 뜻이 이제 비로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에 도달한 것이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우리 민족이 내세울 민중운동사 가운데 이 동학농민혁명만큼 자랑스런 역사가 또 어디에 있는가.아니,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그 혁명정신을 널리 널리 알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은 무슨 기념사업단체만의 사업에 그칠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과제가 되어야 한다.우선 동학농민군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봉준은 사형이 선고되자 고문으로 가누지 못하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정의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하였다.





농민군들을 민란의 ‘반도’로 남겨둔대서야 민족정기의 체통이 서지 않는다.그들을 마땅히 국가유공자의 반열에 모셔야 한다.





나라와 국민의 이름으로 그렇게 결의하자는 것이다.그들을 ‘죄인’으로 놔둔 채 추모하고 기념사업을 한다는 것은 모순천만이기 때문이다.





농민군의 묘역 조성도 절실하다.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급의 묘소가 더러 허묘(虛墓)일망정 있기는 하지만,김제 원평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는 이름 없이 숨져간 농민군들의 무덤이 표석 하나도 없이 야산이나 들판에 방치된 채 폐묘화하고 있다.





이들의 시신·유골을 한 데 모아 무명 농민군 총(塚)을 만들고 묘역을 조성하였으면 좋겠다.그리고 이제라도 그들에 대하여 상훈을 추서(追敍)함으로써 원혼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갖추는 일을 병행할 일이다.





국가는 민간단체의 기념사업을 지원은 하되 그 어떤 통제 간섭도 해서는 안된다.최근 일부 국회의원들이 냈다는 법안은 그런 점에서 문제가 있다.





기념사업회의 명칭·사업을 특정법인이 독점하고 정부의 지도 감독을 받는다는 그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다.





지금까지 활동해온 전국의 기념사업단체들을 배제하거나 흡수하려는 관제방식은 시대착오이자 백해무익이다.





특별법을 만들려면 앞서 말한 농민군의 명예회복·서훈·묘역조성 등의 지원 조항을 담아야 옳다.





일찍이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그의 장편 서사시 <금강>에서 노래했다.





“1894년쯤엔/돌에도 나무 등걸에도/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하늘/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꽃들은 해마다/강산을 채웠다.”





이제라도 우리는 갑오년 그때 이 땅의 민초들의 새 세상을 향한 염원을 되새기고 가꾸어 나가는 일에 가슴을 열어야 한다.새해라지만 아직은 겨울,1백7년 전 함성의 옛 들판에는 바람이 차다. 황량하다.이땅의 민족정기처럼...





<갑오년의 함성,그 역사의 현장>


-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





<한승헌 변호사 약력>


▶1934년 전북 진안 출생


▶57년 고시(8회)사법과 합격. 서울지검 등 근무


▶65년 변호사 개업


▶75년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구속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83년 사면복권


▶98년 감사원장


▶수상 : 중앙언론문화상.청조근정훈장 등


▶저서 : '법이 있는 풍경' '정보화시대의 저작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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