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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을미사변 목격했던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 사바친

중앙일보 2009.12.16 01:38 종합 37면 지면보기
조선에서 활약한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 사바친(1860~1921).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 경운궁(현 덕수궁) 내 중명전과 독립문의 설계자다.[아름터 건축사사무소장 김석순 제공]
벽안의 러시아 사람 사바친(A I S Sabatin)은 1883년 초 세관을 세우기 위한 차관 교섭차 상하이에 온 묄렌도르프의 보좌관으로부터 꿈같은 제의를 받는다. “대조선 국왕이 올바로 사람을 쓰려 하는데 일할 마음이 있으면 외국 조계지 측량과 궁궐 건축을 맡아 달라.” 그해 9월 23세의 청춘은 청운의 꿈을 품고 이 땅에 왔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건축 전문가가 아니었다. “귀하를 천거하기 곤란하다. 최소한 중학교 전 과정을 이수한 인물을 필요로 한다.” 1895년 9월 러시아 공사관은 러시아어학교 교사로 자신을 추천해 달라는 그의 요청을 학력 미달을 이유로 거절했다. “본인은 2급 자격을 부여하는 교육기관이 발급한 증명서를 갖고 있다.” 그의 항변을 근거로 종래 그가 ‘육군유년학교 공병과’를 나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아들 표트르가 기억하는 부친은 ‘독학으로 공부’해 입신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타지아나 심비르체바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 교육기관 중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항해사양성 전문 강습소’(maritime Classes)를 수료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식 자격증이 없던 건축가였기에 유럽의 전통 양식에 한국적 특색을 가미한 독특한 창조물을 남길 수 있었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신로만 양식’을 따랐지만, 장식을 최소화함으로써 한국의 전통 건축미도 배어 나오는 독립문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인천부두와 해관청사, 세창양행 직원 사택, 러시아 공사관, 덕수궁 내 중명전과 정관헌, 그리고 손탁호텔 등. 1904년 러일전쟁이 터져 귀국길에 오르기까지 20년간 그는 자신을 ‘조선 국왕 폐하의 건축가’로 칭하며, 죽어가는 왕조의 마지막 길이 어떠했는지를 증언하는 축조물을 개항장 인천과 수도 서울에 남겼다.



“마루는 20~25명의 양복 차림 일본인들이 일본도로 무장한 채 점거하고 있었고, 그들은 방의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 그는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일본의 우익 낭인들에게 참살 당하는 비극을 목격하고 그 만행의 진실을 당당히 증언한 ‘고매한 목격자(noble Witness)’이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국민국가를 세우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몸은 썩어도 뼈는 남듯이, 그의 손길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들은 남의 힘을 빌려 살아남으려다 망국의 슬픈 역사를 쓰고 말았던 그때의 뼈아픈 교훈을 망각하지 말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남아 오늘 우리 곁을 지킨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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