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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누가 위기를 부르나

중앙일보 2000.05.23 00:00 종합 7면 지면보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놀란다고 했던가. 외환위기를 겪은지 2년반만에 우리경제 여기저기서 '불이야' 하는 경보가 울려대고 있다.





1997년에는 '불이야' 하는 외침 한번 제대로 못들어보고 졸지에 나라경제가 거덜났었다. 따라서 조그만 위험신호에도 '새가슴' 이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경제전문가도, 언론도 환란을 예측 못한 그 때의 '지은 죄' 때문에 이번에는 '불이야' 를 목청껏 외쳐댄다. 심지어 위기론을 한두번 들먹거리지 않으면 전문가축에 끼지 못한다는 우스개도 나돈다.





그저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이 튼튼하기 때문에 위기는 오지 않는다' 는 정부당국의 말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97년 당시 정부는 코앞에 닥친 위기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금은 사방에서 위기라는데 현정부는 뭘 믿고 위기는 오지 않는다고 우기는가.





우리 경제의 겉모양은 멀쩡하고 활기에 차 있지만 여기저기 불안한 조짐이 속속 불거지고 있다. 올들어 무역수지흑자는 지난해의 10%밖에 안되고, 단기 외채비중은 환란 이후 처음으로 30%가 넘었다.





각종 개혁에 '피로' 가 누적되면서 투신을 비롯한 금융불안은 가중되고 나라빚까지 눈덩이처럼 불어 위기대처 능력은 급속히 저하되고 있다.





특히 주식시장의 침체로 기업들 자금조달에 비상이 걸리고, 임금인상 등 '제몫찾기' 를 위한 노동계의 '춘투' 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이 고비에 대응을 잘못하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당연히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위기의 조짐을 대내외에 요란하게 '광고' 하는 것 같은 과민반응은 곤란하다. 위기의 역학(力學)은 묘한 속성을 지닌다. 잘못되는 쪽으로만 롤러코스터처럼 치닫는 경향이 있다.





또 심리적으로 패닉(공황상태)에 빠져들면서 위기를 스스로 실현해(Self-fulfilling) 내기도 한다. 증시의 개미군단들 가운데 "주식 다 내다팔고 예금 모조리 찾아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겠다" 는 얘기들이 나돈다니 기가 찬다. 누구를 위한 위기론이냐는 반문도 나온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위험한 것은 경제이슈의 '정치화' , 즉 위기론을 정치공세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다. 체구가 건장한 사람도 뇌출혈로 졸지에 쓰러지듯 외관이 멀쩡한 나라경제도 일시 돈흐름이 막히는 '돈맥경화증' 으로 순식간에 마비될 수가 있다.





가뜩이나 우리경제는 이렇다 할 '방파제' 없이 외국돈의 밀물.썰물에 연방 출렁대는 처지다. 바깥의 위기경보는 선의의 충고도 있지만 전략적 이해(利害)도 숨어있는 법이다.





현 위기론의 본질은 부실정리와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정부당국과 이해집단들이 벌이는 줄다리기에서 찾아야 한다. 시간벌기와 지연전술, 도덕적 해이와 책임 떠넘기기 등으로 좀처럼 진전을 모른다. 바깥의 불신도, 정책의 혼선도, 정부의 신뢰상실도 여기서 빚어진다.





따라서 투명성과 일관성을 갖고 부실정리와 구조조정을 하루속히 매듭지어 투자자와 시장에 예측가능성과 믿음을 심는 일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임시방편적인 대증(對症)요법은 위기를 키울 뿐이다. 판에 박힌 '펀더멘털 타령' 도 이제는 그만둬야 한다.





폴 크루그먼은 펀더멘털의 구성요소에 재정의 건전성과 거시정책적 대응능력, 환율체제, 그리고 이들에 대한 국내정치적 합의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총체적 위기대처 능력이 펀더멘털의 핵심이다.





반토막난 코스닥주가가 위기감을 부채질하지만 닷컴주가는 세계적인 조정국면을 거치고 있을 뿐 그 흐름자체가 뒤바뀔 수는 없다. 지레 좌절해 중도포기하면 선진국과의 'e'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따라잡기 힘들어진다는 경고도 나온다. 투매가 능사가 아니고 우리 기업들의 내재가치와 장래에 대한 투자자들의 믿음과 자신감이 중요하다.





97년 환란직전 필자는 "국제수지나 무역적자보다 몇배 더 무서운 것은 '신뢰의 적자' 다. 이 적자가 메워지지 않는 한 한국경제에 '불이야' 경보는 그치지 않는다" 고 쓴 적이 있다. 이 '적자' 를 메우는 일은 비단 정책당국만이 아니고 정치권과 언론, 각 경제주체 등 우리 모두의 몫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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