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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코드 2000] 8.보약의 나라

중앙일보 2000.04.22 00:00 종합 35면 지면보기
"애가 밥을 잘 안먹고 짜증을 자주 내요. 체력을 보충해주면서 머리도 맑게 하는 처방을 해주세요. 총명탕도 겸해서요."





지난 19일 오후 6시 서울 마포의 모 한의원 진료실. 50대 초반의 부인이 고3 아들을 데리고 와 상담 중이다.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뻐근해요. 눈도 침침하고…. "안경을 쓴 교복차림의 학생이 증세를 말한다.





"학업 스트레스에다 만성피로가 겹친 거죠. 위장도 약해졌고. 태음인이니 녹용대보탕이 맞습니다.





총명탕보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고본.백지.천마 등을 첨가해 드리죠. 약은 달여서 팩으로 보내드릴테니 하루 세차례 식사 30분 전에 먹이세요." 35만원에 보름치 보약을 지은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료실을 나갔다.





네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30대 중반의 어머니가 진료실에 들어온다.





"밥알을 세면서 밥을 먹어요. 얼마나 속상한지. 애가 기운도 없고 살도 잘 안찌고." 위장을 좋게 하는 향사양의탕을 위주로 인삼.황기.백출을 첨가한 보약 10첩이 처방됐다.





테헤란로에서 정보통신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박모(45)사장은 냉면도, 숙주나물도, 기름기 많은 음식도 먹지 않는다. 보약을 먹기 때문이다.





하루 세차례 식후 2시간마다 팩을 마신다. 하루 4~5시간만 자면서 일에 매달린 결과 만성피로와 두통이 떠나지 않았다. 친지의 권유로 1백50만원을 들여 한달치 보약을 지었다.





한국은 보약의 나라다.





돌배기 아기(귀룡탕)부터 80대 노인(음양쌍보탕)까지 연령별로 먹는 보약이 정형화돼 있을 정도다.





가장 건강할 것 같은 운동선수도 대부분 보약을 달고 산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인삼과 장어를 넣은 한약을, 골프여왕 박세리는 녹용과 인삼을 주로 한 한약을 즐겨 먹는다.





프로야구 선수의 수입 4분의1이 보약값으로 나간다고 할 정도다.





가입자의 부모에게 매년 한번씩 보약값이 지급되는 효도 보험상품까지 있다.





부유층에게는 녹용.사향을 주원료로 한 공진단이라는 환약이 유행이다.





서울 역삼동 국보한의원의 안보국 원장은 "한통에 수백만원, 산삼을 첨가하면 수천만원씩 하는 공진단이 체질에 관계없이 남용되고 있다" 면서 "국내에서 사향을 구하기는 극히 어렵기 때문에 시중의 공진단은 대부분 가짜일 것" 이라고 지적한다.





경희대 한방병원 보양클리닉의 이장훈 교수는 "보약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소아.청소년.중장년.노인 등 모든 연령층이 마찬가지다. 경제가 좋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때문이다.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의식의 변화도 한 요인" 이라고 말한다.





"경제난 이후 과중한 신체적.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는 중장년 직장인이 특히 보약을 찾는다" 고 한다.





1998년 이화여대 한국학과 송화숙씨의 석사논문 '도시 중년 남성의 건강식품 섭취태도' 에 따르면 앞으로 섭취하려는 건강식품 가운데 으뜸이 '한방보약' .그 다음이 영양제.보신식품.건강보조식품의 순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도 건강관리법을 '보약 등 건강식품' 으로 답한 응답자가 2위(6.5%)를 차지했다.





이런 보약 열풍은 한의학의 원조인 중국에는 없는 것. 음식인류학을 전공한 세종대 역사학과의 주영하 교수는 "중국에선 약으로 먹는 보약의 개념은 없다. 한국에만 독특한 현상" 이라고 지적한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중앙민족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주교수는 "중국인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양생은 음식으로 한다. 우리처럼 따로 약을 먹지는 않는다. 중국인에게 인삼차를 선물하면 반기지 않는다.





하지만 요리를 할 수 있는 인삼을 그대로 선물하면 무척 좋아한다" 고 말한다.





한국에서 보약이 일반화한 이유를 주교수는 민간에서 전승돼온 양생의식과 현대의 경제적 여유가 결합한 결과로 본다.





"근대에 서양의학이 들어와 전통의학을 압도하면서 한의원은 주로 양생을 위한 보약을 짓는 곳으로 일반에게 인식됐다" 는 것이 주교수의 지적이다.





관심과 애정을 표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해석도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과의 조두승 교수는 "보약은 자신이 직접 지어 먹기보다 가족이 해주는 것이 일반적" 이라고 전제하고 "애정과 관심을 표시하는 한국적 방식의 하나로 보약이 자리잡은 것" 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식사하셨습니까" 가 인사로 통용될 만큼 먹는 것이 부족하고 중요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직접 먹는 것, 그중에서도 비싼 것' (보약)을 지어다 주는 것은 먹는 사람이 마음 깊이 새길 수 있는 정표의 의미를 갖게 됐다는 해석이다.





조교수는 여기에 '우리 것이 좋다' 는 인식의 확대, 바쁜 현대생활에서 애정을 몰아서 표시하는 방법으로서의 기능, 과거에는 부자들만 할 수 있던 일에 대한 한풀이 등의 해석을 덧붙였다.





건강을 위해 미국 사람은 조깅을 하고 한국 사람은 보약을 먹는다고 한다.





이는 육식 위주의 활동적인 서양인과 채식 위주의 농경민족 출신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조현욱 기자





◇ 도움말 주신 분 : 경희대 한방병원 소아과 김덕곤 과장.김수범 우리 한의원 원장.이응세 예 한의원 원장.이승교 명인 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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