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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44주년 중앙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2009.09.17 15:30 부동산 및 광고특집 7면 지면보기
포개지는 우주, 그 떨림의 시학 -장은석-



0. 전주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중략)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 이성복 '입술' 부분 『그 여름의 끝』 1990



1. 두 개의 목



동그랗고 살짝 옆으로 늘어진 두 겹의 피부를 바라본다. 얼굴 아래에 도톰하게 솟아올라 붉은 방점을 찍는 입술. 이 두 개의 간극이 갈라지면서 우리는 세상에 첫 울음으로 자신을 알린다. 하나의 숨결은 점점 자라나 음성이 되고 언어가 되며 매끄럽던 입술은 증오와 상처, 매혹과 열망의 주름들로 덥힌다. 어미의 가슴에서 생명의 양분을 빨던 입술에 주름이 늘어갈 때, 그 주름들이 낯설고 이질적인 타인의 주름과 겹쳐질 때, 얼굴은 사라지고 커다란 네 겹의 입술이 남는다. 은밀한 내부로 통하는 입술은 두 인격이 만나는 경계이자 최전선이다. 그래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타인의 침입을 허락하는 순간의 충격은 오래 마음의 자리를 맴돈다.



기억의 주름들을 잔뜩 품은 입술은 ‘침묵’과 더 가깝다. 한용운이 노래한 것처럼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이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뒤에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지만 내 입술만은 여전히 당신의 입술을 알아본다. 오직 그리움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입술은 부재의 척박한 영토에서 유일하게 피고 지는 꽃이 된다. 이제 그 꽃나무들이 어떻게 자라나 숲을 이루는지 들여다보자.



두 개의 목이

두 개의 기둥처럼 집과 공간을 만들 때

창문이 열리고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

두 사람은 나무처럼 서 있고

나무는 사람들처럼 걷고, 빨리 걸을 때

두 개의 목이 기울어질 때

키스는 가볍고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 더 큰 물방울들이

숲의 냄새를 터뜨릴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 김행숙 ‘숲속의 키스’ 전문 『이별의 능력』 2007



이성복이 침묵의 자리에 입술의 꽃나무를 심었다면 김행숙은 그 입술조차 지워버린다. 눈멀고 귀먹은 얼굴에서 입술까지 떼어내고 나니 얼굴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숲은 번성한다. 그녀의 시들은 이처럼 얼굴을 벗어날 때 가장 반짝인다. “얼굴을 벗어나는 얼굴은 유령처럼” 아무 것도 없는 듯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놀랄 때, 비로소 “조용해지고, 세계는 단순한 윤곽을 드러낸다”('검은 해변') 아주 고요하고 아름답게.



두 개의 목이 있다. 두 개의 목은 ‘기둥’이라는 비유를 통해 ‘집’과 ‘공간’을 만들어낸다. 또 무언가를 떠받치고 있다는 점과 함께 땅에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을 통하면 ‘기둥’에서부터 ‘나무’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목→기둥→나무’로 이어진 상상력이 집을 만들어냈으므로 그 집에 ‘창문’이 있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갑작스런 열정으로 서로를 껴안는 두 사람, 이러한 키스 직전의 순간. 두 연인들에게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느려진 시간 때문에 외부 세계는 상대적으로 더욱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로 비유된 두 사람의 주변에 다른 나무들이 더 빨리 걷는 것은 이러한 시간의 상대적 느낌을 설명해준다.



실제로 이 시는 아주 짧은 ‘순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계속 반복되는 ‘~때’를 통해 키스가 이루어지는 순간의 느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기울어지는 목에 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키스는 이제 아주 가벼워진다. 목은 기둥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무로 비유되었으므로 거기에 달린 나뭇잎에 관해서는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은? 가장 친밀하고도 원시적인 ‘교환’의 순간에 “숲의 냄새”가 퍼져나간다. 마치 그 때의 합일은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은 듯”하고 나아가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온 듯하다.



다시 지워진 얼굴로 되돌아가보자. ‘키스’라고 부를 때 흔히 떠올리게 되는 ‘표정’들을 이 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감은 듯 뜬 듯 알 수 없는 눈이나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과 같은 익숙한 이미지들은 ‘얼굴’과 함께 사라진다. 대신 얼굴이 내보이던 이미지에 가려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그래서 투박하고 단순하게 느껴질 것만 같은 ‘목’이 있을 뿐. 강렬한 이미지들은 이미 다른 미디어에 아주 흔하고 세세하게 수도 없이 걸려 있다. 과연 시가 그것을 따라잡을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관념 쪽으로 발을 옮길 수도 없다.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이 환기하는 간결하고도 미묘한 뉘앙스를 떠올려보자. 이런 상상력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완강한 자기만의 표정’을 지우고 서로의 얼굴이 바뀌는 경험과 함께 황홀하게 움직이는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2. 두 개의 문



키스, 연원을 알 수도 없는 이 오래된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아무리 진화하고 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사실 키스를 정면에서 관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과거 많은 작품들 속에서 종종 키스는 포옹이나 다른 어떤 신체 접촉의 배후에 머물러 왔다. 또 ‘맹세’라든가 ‘추억’, ‘절망’이나 ‘감탄’과 같은 관념에 짓눌려 ‘불꽃’이나 ‘파도’와 같은 비유로 치장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다채롭고 화려한 시각 이미지들로 가득 찬 요즈음의 미디어들에서도 오히려 키스는 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상징적인 감정의 차원을 잃어버리면서 미묘함마저 사라진다.



동작의 측면에서 보자면 키스는 단순하면서도 대단히 복잡하다. 단순히 친밀감을 표현하는 가벼운 키스에서부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연인들의 키스까지, 손에 하는 키스에서부터 볼, 머리, 입에 하는 키스까지 많은 종류의 키스가 있다. 다양한 양상의 포즈는 어딘가에 ‘입을 맞춘다’는 공통적인 행위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관례적이고 성스러운 행위에서 연인들의 전유물로 바뀌면서 키스는 내밀한 비밀을 품게 되었다. 혀의 움직임과 맛, 부드러운 근육의 움직임과 함께 은밀한 내부의 모든 변화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특히 한국어의 자장 속에서 ‘키스’라는 말은 더욱 이런 변화의 어감을 품고 있다. 현대시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애나 존경과 같은 관례적인 의미들은 대개 ‘입맞춤’이라는 어휘로 몰려왔다. 외래적인 어휘인 ‘키스’는 ‘입맞춤’과 사선을 지으며 새로운 감정적 차원을 만들어낸다. 김행숙이 “혀를 내밀어봐.”라고 속삭이며 “맛에 대해서 / 네 체온에 대해서 / 목소리와 천둥에 대해서”('혀') 궁금해 할 때, 강정은 더 나아가 달콤한 키스가 품은 모든 “미완결의 위선”들에 “입을 열어 칼을 들이민”다.('사실, 사랑은…') 내보이기 위한 자기만의 표정과 유혹적인 외피에 휩싸인 입술은 지워지고 난도질된다. 심지어 그는 “식도를 거슬러 키스하는 시인의 입술을 뽑는다”('영화') “내 혀가 잘리고, / 망막의 푸른 통로가 잘리고, / 귓불의 도톰한 연륜이 잘”리는 순간 비로소 “이미 퇴화한 감각에 대한 질긴 향수”('낯선 짐승의 시간')가 다시 고개를 들고 ‘너’와 ‘나’ 사이에 ‘표정’으로 구획된 ‘경계’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와 당신 사이에 / 나와 당신과 무관한 / 또 다른 인격이 형성”('불탄 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중략)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 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 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 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 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 강정 '키스(1)'부분 『키스』 2008



문은 경계의 표상인 동시에 입구의 지표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내부는 문에 의해 외부로부터 보호받는다. 문은 내부와 외부, ‘이쪽’과 ‘저쪽’을 잠그고 그것을 열고 닫는 의지를 발동시킨다. 한편 ‘열고 닫는다’는 말은 다시 ‘출입’을 상기시킨다. 처음부터 출입의 전제가 없다면 문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더 튼튼한 벽이면 충분하다. 문은 물샐 틈 없는 벽의 틈새에 해당한다. 단단하고 육중한 벽의 한 귀퉁이에 뚫어놓은 구멍인 문은 평소에는 벽과 평행하게 서서 의젓하지만, 주체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냉큼 그 속을 내보인다.



몸의 내부, 그 내밀한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개다. ‘나’는 먼저 그 중에 한 개의 문을 열고 ‘너’의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전주곡처럼.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라는 선언에 갸우뚱 할 필요는 없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닫힘’이 아니라 구체적인 ‘열림’이다. 평소에 닫혀 있던 문은 ‘너’ 혹은 ‘나’에 의해서만 상호 열린다. 이 때 ‘너’와 ‘나’는 문인 동시에 ‘열쇠’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이것은 똑같이 짝을 이루고 있는 다른 시(‘키스(2)')와 함께 살펴볼 때 더 선명해진다. 잠시 뒤로 미루어놓기로 한다.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너’의 내부, 너만의 넓은 세상을 파고든다. ‘나’는 턱없이 짧은 혀를 벗어버리고 한 마리 뱀처럼 늘어나 ‘너’의 “심장을 만지고” 네 몸 속 깊은 곳을 탐색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입’은 정확한 경계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 혀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에서부터 목구멍 그리고 식도를 거쳐 몸의 중심 깊숙한 곳까지, 모든 것은 관통되어 연결된다. 정말 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입술 뿐 아닐까.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명확한 표식. ‘내’가 ‘너’에게 들어가는 방식은 이전에 알려졌던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들었던 것-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과 수많은 감정들-은 ‘나’의 감각이 아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문 안의 세계, 길고 구불거리고 미끈미끈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온 몸으로 접촉하고 맛보는 것이다. 한용운에서부터 이성복까지의 시인들이 ‘귀먹고’ ‘눈멀었다’는 표현은 눈과 귀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보고 듣는 인식으로 감정의 극단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강정은 이러한 감각으로부터의 이탈을 기도한다. “온통 마술로 변한 세상”에 칼을 들이대고 “사지를 각각 떼어내 따로 놀게” 만든다.(‘마술사의 아이’)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을 들여다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냄새로 사물을 식별하는 건 비단 네발짐승의 장기만이 아니다 / 지워진 너의 냄새가 사방

분분한 낙엽의 마지막 숨결에서 배어나온다 / 이 친밀도 높은 인분의 기척을 나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전망으로 읽는다(‘낯선 짐승의 시간’ 부분)



그는 눈과 귀를 막고 ‘그리움’의 장막 안에 머물기보다 그것을 들어내고 직접 냄새 맡고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 또한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전망”이라 여긴다. 심지어 “내 피부는 그녀라는 껍질 속에서 뱀과 두더지의 어긋난 주행법을 익”히며 “그녀라는 존재는 내 파인더에 밀집된 검붉은 돌기와 미끈한 점액 말고 이 세상에 없”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그녀라는 커다란 숨구멍, 혹은 시선의 감옥’)



다른 감각의 추구라는 지점에서 김행숙과 강정이 겹쳐진다면, 그 지점을 육식성으로 틀고 있다는 점에서 강정은 분리된다. 그녀의 시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가로수나 녹아 흐르는 맹목적인 팔다리가 “음악과 시의 법칙”을 양분으로 삼아 시들고 자란다면 그는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는 “서글픈 육식동물의 눈알을 탐”('낯선 짐승의 시간')한다. 몸부림의 궁극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단의 임사체험”이 된다.” “흡혈의 미학”은 이러한 황홀함 맨 저쪽 편 끝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교환되던 물방울(타액)은 이빨을 박아 넣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문(구멍)을 만들고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뜨거운 피를 빨아올리는 한 마리 육식동물의 난폭함과 대비된다. 이제 “살짝 혀를 빼”고 두 번째 키스를 들여다보자.



3. 두 개의 문에서 네 개의 문으로



오래되어 무감해진 상형문자에서 보듯 마주본 두 쪽이 만나 문이 완성(門)된다. 두 개의 詩, 두 개의 키스가 만나니 비로소 온전하게 문이 활짝 열린다.



나는 문을 닫고 너의 몸을 받는다 내 안으로 들어온 너는 사뭇 여장부스러운 근골과 큰 키를 과시한다 뒷굽이 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하이힐을 또박또박 디디며 혓바늘 사이를 배회한다. 몸 밖으로 빠져나온 네 혀가 나라는 한 세상을 뒤집어 오랫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길몽과 흉몽 사이의 아득한 절대치의 추상화를 구상화한다 너는 무용에 어울리는 몸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건축에 어울리는 몸을 가졌다 그리하여 너는 내 몸이라는 凶家에서 춤추는 무희가 된다 내 혀는 너의 동선을 따라하며 네 가족들의 불편한 심기를 박물화한다 (중략) 나의 문은 너에 의해 닫히고 나의 문밖에서 모든 시간은 풀어진 물감처럼 시계 밖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내 속에서 죽었던 것들이 관 뚜껑을 열듯 내 몸을 열고 문 열린 너의 바깥으로 날아간다 두 겹으로 붙어 네 겹의 문으로 열리는 이 방생의 순간, 네 눈 속에 담겨 있는 짐승은 고대 중국 용봉문화 관련 서적에서 문득 흘려 보았던 오래전 내 얼굴이다 기뻐하라 너는 이제 오래전부터 인류가 꿈꿨던 환상의 미래, 춤추는 龍의 후손을 임신한 것이다



― 강정 '키스(2)'부분 『키스』 2008



이번에는 ‘내’가 “문을 닫고 너의 몸을 받는다.” “내 안으로 들어온 너”에서 알 수 있듯이 주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열쇠’의 의미는 유효하다. 다만 ‘내’가 여닫던 ‘너의 문’ 대신 “나의 문”이 “너에 의해 닫”힌다. 여는 주체는 정확히 짝을 이루어 반대가 되었지만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상대는 그대로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절대적 제한은 쾌감을 절대치까지 끌어올리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위치가 바뀌어 ‘나’는 제법 장부의 풍모를 가진 ‘너’에게 몸을 맡긴다. ‘너’는 몸 밖으로 혀를 꺼내어 “나라는 한 세상을 뒤집어”놓는다. 꿈속과도 같은 아득함을 주도하는 이는 이제 ‘너’다.



‘무용 / 건축’의 조합은 그대로 ‘음악과 시 / 원형과 전형성’의 조합과 포개진다. 그렇지만 이것은 재래의 ‘여성 / 남성’의 조합과는 전혀 다르다. 개별 주체인 ‘너’와 ‘나’의 특성에 불과하다. 실제로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쌓아올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건축’에 어울리는 ‘나’의 몸은 여기서 완전히 무용無用한 흉가가 된다. 주도권이 역전되면서 전세는 균형을 이룬다. 최초이자 마지막 남자라고 외치며 난폭하게 문을 열고 닫던 남자는 힘을 잃고, “내 혀”는 겨우 ‘너’의 “동선을 따라”간다. 강정의 시는 이처럼 ‘나와 너’, ‘안과 밖’ ‘여자와 남자’의 경계와 차이가 무너질 때 가장 빛난다. 서글픈 육식동물의 표정으로 헛된 위선을 내려놓을 때, “전쟁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한 발짝 발을 빼고 “무언가가 떠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日沒')을 때, 그의 문장은 “세계라는 허물을 벗”고 “만물의 리듬을 체득”(‘그녀라는 커다란 숨구멍, 혹은 시선의 감옥’)한다.



두 개의 문 중에서 나머지 한 개를 언급할 때다. 배설의 통로를 제외하면 인간의 몸은 모두 두 개의 출입구를 지닌다. 하나는 얼굴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모든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다. 금기에 둘러싸인 다른 하나는 대개 감춰져 있어서 더 내밀하다. 흉가와 같이 망가진 ‘나’의 몸은 ‘너’의 무용, 한바탕 굿과 같은 ‘너’의 키스에 의해 되살아난다.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내 속의 것들이 “관 뚜껑을 열듯 내 몸을 열고” 날아오르는 순간 생명을 얻는다. ‘나’와 ‘너’가 각기 가진 두 개의 문이 모두 활짝 열리고 “네 겹의 문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 잉태된 생명은 낡은 감각의 자손이 아니다. 고립되어 있고 상투적인 시각 중심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온, 모든 감각이 총동원된 혼성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맥루한이 부족 세계로의 회귀를 예언했듯이 감각의 부활은 고대의 아주 오래전 모습과도 닮았다. 키스의 전주곡은 이렇게 완성된다: “기뻐하라 너는 이제 오래전부터 인류가 꿈꿨던 환상의 미래, 춤추는 龍의 후손을 임신한 것이다” 용과 봉황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비상.



4.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기분



두 겹의 입술을 들추면 먼저 보이는 혀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혀 말고도 금방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이빨은 유연한 혀보다 더 쉽게 외부에 내보인다. 위 아래로 죽 늘어서서 작은 미소에도 금방 반짝이는 희고 단단한 조각들. 이빨은 입술이나 혀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입의 일부다. 강정의 첫 번째 키스에서 등장했던 바로 그것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더 나아가려 한다.



여기서 무는 행위를 키스에 포함시킬 때 당혹스럽게 여길 당신들이 꽤 있으리라 믿는다. 실제로 감정의 극치에서 희열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시도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물학의 계보를 통해 보더라도 무는 행위가 키스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E. 보르네만은 무는 행위가 “인간의 정상적 성교행위”라고 하면서 또 그것이 “인간의 계통발생적 구조”의 속성에 해당하며 키스의 근원적 형태를 나타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뚝이나 마늘, 피와 불멸에 대한 전설들 때문에 이 대목이 대중적인 것에 대한 경도로 비추어질 우려도 충분히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대한 미신에 홀려 있다는 혐의를 받는 것은 더 불편하다. 갑자기 건너뛴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다음과 같은 시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살이 빨라 어지러워 / 눈을 찡그리며 웃고 싶은데 / 송곳니가 널 무섭게 할까 봐 // 세상에는 자전거를 못 타는 기분도 있다 / 송곳니가 반짝이는 이상한 기분은 /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기분으로 위로할 수 있지



(중략)



우산을 쓰고 자전거를 탈 수는 없다 / 지붕에 올려놓은 신발들은 / 발이 없어서 물만 채우고 있겠지 // 이제는 송곳니를 닦아야 할 시간



― 이근화 ‘송곳니’부분 『우리들의 진화』 2009



화자는 빠른 물살 때문에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고 눈을 찡그린다. 그러나 유난히 뾰족한 송곳니가 그런 화자의 마음을 가로막는다. 어쩌면 “널 무섭게 할”지도 모르는 송곳니는 감추고 싶은 대상이다. 타인에게 드러나는 인상이 관계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날카롭게 드러난 송곳니를 인위적으로 깎고 다듬어 고르게 맞춘다. 송곳니가 유난히 크고 앞으로 삐져나온,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특히 그런 소외의 감정이 자연스럽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악마나 요괴, 마녀나 거인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어쩌면 근대의 사회성을 결여한 외롭고 이상한 사람들의 변형일지도 모르겠다.



자전거를 타는 일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못 타는 기분”은 보편성에서 떨어져나온 어떤 특수성이 된다. 유난한 송곳니의 특이성은 이렇게 자전거와 연결된다. 그렇지만 화자는 수동적인 자기 위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기분”의 암시를 넌지시 던진다. 야릇한 뉘앙스 속에서 강박은 으쓱함의 ‘위로’로 바뀐다.

“우산을 쓰고 자전거를 탈 수는 없다”는 다소 돌출되어 보이는 발언은 ‘송곳니-자전거’로 이어지는 의미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산은 비를 피하기 위한 도구다. 비가 내려서 온 몸이 젖을 줄을 알면서도 굳이 자전거를 탈 필요는 없다. 비가 온다면 어느 한 쪽을 포기하는 것이 맞다. 자전거를 못 타는 화자가 젖는 것을 감수하고 자전거를 선택할 리가 없음은 자명할 것 같다. 아주 무심하게 화자는 자전거를 포기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장에 있거나 발에 신겨져 있어야 할 신발이 지붕에 올려 있거나 발에 신겨 있지 않다면 속절없이 젖을 것은 당연하다. 비가 내리거나 물살이 빨라 어지러운 ‘상황’은 화자에게 ‘선택’의 기로를 들이민다. 송곳니를 감추고 웃지 않을 것인가, 드러내고 웃을 것인가. 화자는 “송곳니를 닦”기로 결정했다.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아니 매혹적인 기분을 느끼고 선사하고 싶어서? 이토록 미묘하고도 황홀한 감각으로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서?



나는 무엇을 갈망하는지 몰라서 / 피에 탐닉한다. 피에 물든 달을 꿈꾼다. / 검붉은 노래와 울음과 시를 입 안 가득 머금고, / 겁에 질려 말을 잊은 골목길 모퉁이에서 / 앞머리 늘어뜨린 창백한 얼굴로, / 텅 빈 눈과 깨물어 붉어진 입술로 우두커니 선다. / 갈 곳을 잊은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 장이지 ‘젊은 흡혈귀의 초상’부분 『안국동울음상점』 2007



인용한 시편을 처음 읽었을 때의 황폐와 공허를 떠올린다. 떠도는 이미지들은 매혹적이었지만 낱낱의 이미지들은 “갈 곳을 잊”어 하나의 리듬을 형성하지 못하고 쉽게 흩어졌다. 물론 역설적으로 목적지를 모른다는 것이 이 시의 매력이자 정체성이지만 그런 “갈망”은 결국 “탐닉”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겁에 질려 말을 잊은” 그런 “창백한 얼굴로” 백지 위에 내몰린, 오직 “물고 싶은 송곳니와 물리고 싶은 목을 가진 / 젊은 영혼들”(같은 시의 다른 부분)의 ‘초상’을 목도하고 있자면 이 시를 읽는 또 다른 누군가도 잔혹하거나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맥락에 녹아들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걸려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론적 인식의 함정에 빠져서 새로운 상상력의 틈입에 무조건 고개를 내젓는 것도 문제지만 시적 정체성의 총체를 함부로 부인하고 새로 발굴된 감각을 평범하게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은폐하고 부정적인 미신의 망령을 소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비록 헛된 소문이 가득하더라도 불안의 갈피에서 아름다운 소멸의 지점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리듬과 같은 시적 언어 고유의 자질과 온갖 비유로 뒤엉킨 의미론의 자질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에 끝없이 다가가려는 용기를 내야 한다.



당신이 나를 당신의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면

나는 아이의 얼굴이거나 노인의 얼굴로

영원히 당신의 곁에 남아

사랑을 다할 수 있다.

세계의 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살아 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은 당신의 소년을 버리지 않아도 좋고

나는 나의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세계의 방들은 온통 열려 있는 문들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 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 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 버리지 않는다면.



― 하재연 ‘안녕, 드라큘라’전문 『시인세계』 2009 봄.



이 시는 전체적으로 ‘가정’과 ‘맹세’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나’는 “나를 당신의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면” 노인이 될 때까지, 영원히 사랑을 지속하리라 약속한다. 뒤에 나오는 “순백의 신부”라는 구절과 함께 생각해보면, 마치 혼인을 약속하는 자리에서 흔히 듣는 어감과 유사하게 들릴 지경이다. ‘이제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다’는 말 뒤에 이어지는 성혼 선언을 떠올려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이어지는 두 개의 고백. 세상은 온통 빛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기에 속한 방들은 모두 활짝 문이 열려있지만 드라큘라의 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열린 문을 지나 빛의 한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의 운명에 관해서라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어둠 속 닫힌 문의 내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있는 ‘당신’을 알아보는 것은 오직 “나 하나 뿐”이라고 연달아 반복하는 화자의 고백. 그 고백은 단지 드라큘라에게 전하는 말로만 들리는가. 송곳니가 뾰족한 우리는, 아니 또 다른 어떤 내적 고통을 지닌 우리는 때때로 골방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 않는가.



두 개의 마침표를 지나 다시 새로운 맹세로 진입한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자에게 매혹당한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순결한 미치광이”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순백의 신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가치-‘순수 / 기괴’, ‘정결 / 변태’-의 대립 속에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증명”할 거라는 의지를 굳게 천명한다. 그런 의지는 바로 “우리가 낳은 우리들”로 연결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 살아갈 것이다”라는 부분에서 피를 빨고 드라큘라로 변신하여 불멸의 생을 누리는 판타지에 얽매이게 되면 아리송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호한 듯 보이는 시적 의미는 늘 맥락 속에서 선명해진다. 좋은 시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맥락의 그물을 촘촘히 벼르고 있게 마련이다. 이 부분은 앞서의 ‘고백’과 ‘증명’에 대한 ‘의지’와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화자는 지금 자신과는 다른 냉담한 존재, 뚝 떨어져 있는 보통의 자식들을 낳는 것을 거부한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 있는 존재, 그것을 증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자신”과 같은 존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갈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이 내밀한 결합은 “우리가 낳은 우리들”에 의해 “정말로” 지속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지속에 대한 열망과 의지’다.



그러나 이 모든 맹세와 의지는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는 ‘가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주체의 굳은 다짐은 모두 “안녕, 하고 말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라는 전제 아래 가능하다. 과거에 하재연이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속도로 위에서’ 『라디오 데이즈』 2007)고 했던 어감을 떠올린다. 그 때 ‘안녕,’이라는 가볍고 무심한 어조는 ‘만나자’라는 말보다 대단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화자가 전제로 내세우는 것은 아주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다. 그저 ‘당신’은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 안녕,” 이라고 속삭여주면 된다. ‘나’는 완전히 “귀가 멀어버리지 않는” 한 그런 ‘당신’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증명할 것이다.



‘가정’과 ‘맹세’의 어투를 처음 들을 때는 여성 화자가 대단히 수동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변주가 계속될수록 그녀의 강렬한 의지가 더 도드라지고 그녀가 결연한 주체로서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소함 속에서 육중한 것들을 건져내는 것, 낯선 이미지들이 익숙하고 소중한 것들을 단번에 휘감아내는 솜씨가 그야말로 탁월하다. 이 시에서 송곳니를 박아넣고 물어뜯는 키스는 배후에 암시적으로 남아있을 뿐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암시의 국면이 시적 긴장을 더욱 촉발한다. 선혈이 낭자하고 이미지들이 핏빛으로 젖어들지 않으면서도 황홀한 도취에 이르는 방법을 잘 보여주는 시다.



0′. 후주



플라톤은 『향연 Symposium』에서 인간의 원형을 “공 모양으로” 그린다. 네 개의 팔과 다리, 두 얼굴을 가진 쌍둥이적 존재로 말이다. 인간의 프로메테우스적 오만 때문에 제우스가 원래 형태를 둘로 찢어서 남자와 여자라는 개체로 분리했다고도 설명한다. 당신은 이러한 신화가 대단히 서글프게 느껴지는가. 그저 하나일 뿐이라면?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입과 입, 얼굴과 얼굴이 만나는, 용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가 만나는 떨림을 잃어버렸다면?



분명하고 확실한 서정의 문고리인 입술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시의 표정이 흐려지고 유령처럼 모호해져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을 수 없다는 걱정도 들린다. 이제 우리는 문을 변형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문을 떼어내고 아예 다른 방식으로 안팎을 드나들자고 말하는 이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 있던 소통의 문고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기보다 완전히 분해되고 전송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전혀 다른 어울림과 합일의 필연적 운명을 주장하는 자들 말이다. 나 또한 그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증명할 것이다.



마무리를 위해 이민하 시인의 한 구절을, 형식을 생략하는 실례를 무릅쓰고 빌린다: 한 개의 입으로는 태어날 수 없나니, 차가운 혀를 몰래 나누고 우린 스쳐갔네.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첫 키스')




평론 당선소감



아름다운 것들에 관해 발언할 기회 생기는구나…




몽둥이로 때려잡은 나비는 이미 나비가 아니라 시체일 뿐이라는 이야기부터 진짜 좋은 글씨는 낙관(落款)이 없어도 빛난다는 이야기까지 처음 뵌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잊을 수 없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음의 큰 스승이신 오탁번 선생님. 감히 그 매혹을 여기에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말과 문장이 얼마나 세련되고 고혹적일 수 있는지 숨막히는 질투로 바라보게 만드는, 제멋대로인 내가 항상 어려워하는 이남호 선생님. 늘 너그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살펴주시는 고형진 선생님과 마음의 온도가 참 따뜻한 정주리 선생님. 과분할 정도로 다감하고 후덕하게 격려해주시는 강현구 선생님. 하나뿐이지만 영 탐탁찮은 후배를 항상 생각해주는 종태 형과 행숙 누나. 뻑뻑하게 잘 열리지 않는 몽상의 창을 열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 이 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더불어 아름다운 것들에 관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과 더 멋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꽤 근사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꼭 죽을 병이 아니라도 긴 병에 장사 없다며 안쓰럽게 보듬어주셨던 중앙대학병원의 홍창권 선생님과 서울대학병원의 서대헌 선생님. 그리고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하게 내 혈관을 흐르던 항생제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신 김찬우 원장님. 내 몸 속을 들락거린 수많은 알약과 작은 주사바늘들. 끈적하고 누렇게 자꾸만 흘러내리던 핏방울들처럼 매일 똑같이 뒤뚱거리며 뛰어다니던 병원 안뜰의 비둘기들. 정말 죽을 병이었으면서도 그저 난치병일 뿐인 나를 위로하던, 먼저 하늘로 돌아간 내 착한 친구 원섭. 아내들의 질투 아닌 질투를 견디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남은 친구들. 내가 사랑했던 그녀와 나를 사랑했던 그녀. 사랑한다는 표현도 부족한 가족들. 어쭙잖은 포부를 생략하는 대신 이들에게도 반드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우아하고 제법 그럴 듯하게 썼던 당선소감을 다 지우고 나니 결국 이렇게 구질구질한 흔적들이 남았다. 이런 내가 밉고 싫다.



◆장은석=1977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평론 심사평



비평적 감각 살아있는 글 … 멋 부리려는 경향 아쉬워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평론은 모두 6편이었다. 예년처럼 한 작가나 시인을 대상으로 한 작가론·시인론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문학과의 사랑싸움을 보였으나, 많은 경우 사랑의 대상에 이끌리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 어설프거나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론을 적용하려는 경향도 눈에 거슬렸다.



우리 문학을 보는 새로운 독법과 감각, 예리한 논리적 탐색, 문장력과 구성력 등의 측면에서 우선 3편을 가려냈다. 그중에는 지난해에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더했다. ‘여백의 세계와 비극적 상징의 숲: 박상순론’(조준희)은 난해한 박상순의 시를 여백의 세계를 중심으로 탐문한 글이다. 진지하고 꼼꼼한 독법이 눈에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독특한 시적 맥락에 입각한 심화된 해석의 지평에 이르지 못해 기존 논의로부터 멀리 나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이미지즘의 종언, 혹은 스틱스에서 음악하기: 최승호론’(박성필)은 시와 교감하는 수준 높은 감각의 음표들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비평 대상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긴장 역시 어지간했다. 다만 핵심 논지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다. 이미지즘의 종언에서 음악으로서의 시에 이르는 도정이 설득적으로 논증되지 못했다는 소리다. ‘포개지는 우주, 그 떨림의 시학’(장은석)은 키스의 감각적 스펙트럼을 인상적으로 펼쳐놓은 평문이다. 이념의 시대를 넘어온 이 감각의 시대의 핵심 감각 중의 하나를 포착하기 위해 착목한 키스라는 제재도 그렇거니와, 그와 관련해 동시대의 의미 있는 시편들을 가려놓은 수준도 상당했다. 시를 많이 읽고 교감한 결과임을 직감케 했다. 게다가 비평적 자기 스타일을 모색하려는 흔적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비평 대상에 이끌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 스타일 모색은 좋지만 지나치게 멋을 부리려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등은 아쉬웠다.



뒤의 두 편을 중심으로 한 번 더 토론한 다음 우리는 비평적 감각과 스타일 창조를 위한 도전에 상대적으로 더 열의를 보인 장은석씨를 밀기로 쉽게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후일의 정진을 기대한다. 아울러 이번에 기회를 양보한 다른 예비 비평가들에게도 애정 어린 성원을 보낸다.



본심=남진우, 우찬제, 예심=홍용희, 정영훈



[창간44주년 중앙 신인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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