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1998.10.17 00:00 종합 15면 지면보기
제6장 두 행상 ②





"우리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안가는 데 없이 수소문하고 다닌 줄 아는데, 짐작도 안가?" "짐작은커녕 냄새도 못 맡았어. " "임자가 열성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다면 모를까,가근방 어디에 숨어 있다는 걸 임자 혼자서는 알고 있겠지. 공연히 시치미 잡아떼지 말고 냉큼 가서 데려오게. " 변씨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남의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어둠이 깔린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평소에는 몸에 배어 느낄 수 없었던 갯내음이 출렁하고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뒤따라 한 줄기 바람이 가게 앞 좁은 거리의 허섭스레기를 휩쓸고 지났다.





비가 내릴 조짐이었다.


썰렁한 탁자위로 침묵이 흘렀고,가게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을 받고 있는 변씨의 얼굴에는 그 순간 처연한 회한이 스쳐 지났다.


어떻게 할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성가신 파도소리. 아무런 정감도 느낄 수 없는 시큼한 갯내음은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지워지려는 과거의 길목으로 떠밀며 회상의 음률을 떠먹여주는 최면력을 지녔다.





그래서 바다는 회상하기엔 가장 적절한 장소로 회자되어 왔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과거로 이끌려가는 모멸적인 최면력 때문에 바다에 매료되어 숨가쁜 걸음으로 찾아왔던 사람들도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은연중 그 곳을 떠날 수 있는 빌미를 찾게 된다.





자신이 떠나고 싶어하는 심정을 위장하거나 감추기 위해 바다가 자신을 싫증나게 만들고 있다는 배반의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몸뚱이를 굴리며 연명해온 사람들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거센 파도와 싸워온 역경과 고난의 기록들은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기 때문에 오히려 떠날 수 없었다.


변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찢기고 해어진 삶에 자꾸만 고여드는 고난의 기록들은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그것이 오히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선 살 수 없는 흡인력을 지니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서울생활을 미련없이 청산하고 돌아온 것도, 집 떠난 아내의 행방을 공력 들여서 찾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는 바닷바람과 갯비린내와 뱃사람들 특유의 살냄새에 비견하여 그 자신의 인생편력에선 처절하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갇혀 있는 물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의 율동성. 달과 맺어진 조수의 떠남과 만남. 바람과 맺어진 파도의 역동성. 그 모든 것이 변씨에겐 항상 경외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모든 자각들은 막연하게나마 며칠 전에 신문에서 보았던 한 젊은 여성 노숙자의 사진에서 우회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밤마다 억병으로 취하지 않으면 괴로웠던 것도 모두가 그 한장의 사진에서 얻은 회한과 시름인지도 몰랐다.





탁자 위로 후두둑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꼬꾸라지듯 고개를 숙이고 옹알이하던 시선을 들어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철규 혼자서만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다.





까물거리는 시선을 들며 변씨는 철규의 어깨에다 팔을 얹었다.


철규의 곁부축을 받으며 해안도로로 나서는 순간, 변씨의 눈가장자리에는 눈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변씨를 눕힌 철규 역시 옆자리에 누워 덩달아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철규는 성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씨의 잠든 얼굴을 무료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공교롭게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과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토록 암울한 기분일 때, 복사꽃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선할 정도로 전화를 받아주는 여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를 생각하면서 마침 주문진에 돌아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흡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당장 주문진으로 달려 오겠다는 것이었다.


철규도 이튿날로 돌아가려 하였던 작정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