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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어버이도 이유식 먹어야 한다

중앙일보 2009.05.08 01:00 종합 42면 지면보기
 금계랍(金鷄蠟)을 아시는지.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 것이다. ‘염산 키니네’라고도 부르는 하얀 가루다. 맛이 참 쓰다. 예전에는 이 가루를 어머니 젖꼭지에 발라 아기가 젖을 떼게 만들었다. 나도(기억은 전혀 안 나지만) 금계랍 덕분에 젖을 뗐다고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다. 별다른 이유식이 없던 시절, 아기는 맛난 젖에서 밥으로 곧장 식성을 바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금계랍의 쓴맛보다는 밥맛이 나았으니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젖과 멀어지게 됐을 것이다.



요즘엔 거꾸로 부모들에게 금계랍 같은 이유(離乳) 장치가 필요한 것 같다. 부모 나이 오십이 훌쩍 넘도록, 자식 나이 이십대 중반 심지어 서른 살 넘어서까지 젖을 먹이는 경우가 수두룩하니 말이다. 개개비 둥지에서 자란 뻐꾸기 새끼처럼, 집주인보다 덩치가 훨씬 커졌는데도 넉살 좋게 버티고 앉아 먹이를 받아먹는 젊은이들이 내 주변에도 꽤 많다. 그들 몸에 금계랍이라도 발라서 젖 주는 손길을 차단할 수는 없을까.



물론 장성해서까지 먹이를 받아먹는 아들·딸의 심정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에게서 과감히 젖줄을 거두지 못하는 부모 책임도 크다. 영어에도 자식이 떠난 둥지에서 외롭게 사는 부부를 뜻하는 ‘empty nester’라는 단어가 있다. 노년 부부가 정신적 불안감·허탈감에 시달리는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라는 의학용어도 있다. 증세가 서양보다 한국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늦어도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는 사십대 후반께부터는 부모들이 마음속의 금계랍, 정신적인 이유식을 바르고 먹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정의 달인 5월만 되면 각계에서 ‘장한 어머니상’이 쏟아지는데, 거기까지는 좋다고 하자. 한국의 어머니치고 장하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한국의 장한 어머니들은 긴 세월 일방적인 희생으로 “장하다”는 소리를 들은 뒤에도 ‘장한 할머니’ ‘장한 조상님’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자손 앞에서 말이다.



최근엔 부모 세대에도 그나마 변화와 각성의 조짐이 보이니 다행이다. ‘손자·손녀 돌보지 않는 법’이라는 유머가 한 증거다. 며느리나 딸이 부모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맡길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비법이다.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실천하면 더 효과적이란다. ‘김치를 입으로 쪽쪽 빤 뒤 손으로 찢어서 손자에게 먹인다’ ‘행주(또는 걸레)로 입을 닦아 준다’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손으로 때려 잡는다’ ‘밥을 입에 넣어 씹었다가 먹여준다’ ‘빠다(버터)·빤쓰(팬티) 등 토속적인 발음으로 영어 단어를 가르친다’ ‘진한 전라도(경상도) 사투리로 아이와 정겹게 대화를 나눈다’ ‘조기교육 삼아 고스톱을 가르친다’…. 이런 농담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건 그야말로 반가운 조짐이다. 청신호다.



아기 몸에 좋은 이유식이 흔전만전인 요즈음, 이제는 부모 세대가 또 다른 이유식을 복용할 때다. 언제까지나 감싸고 돌지 말고 장성한 자식에게서 과감히 젖줄을 회수하는 효능, 자식이 알아서 자기 길을 개척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닌 이유식 말이다. 길게 보면 그게 자식에게도 약이 된다. 정신적·시간적으로 자식과 거리를 유지해야 빈 둥지 증후군에도 걸리지 않는다.



‘젖떼기’에 성공해서 남는 시간과 돈, 힘은 스스로를 위해 쓰면 된다. 요새는 노인들을 위한 시설도 많이 늘었다. 전국 동네마다 노인대학 없는 곳이 없다. 서울 종로에는 55세 이상 중·노년층만 들어갈 수 있는 라이브 카페가 생겼다. 남백송·박건 등 추억의 가수들이 노래한다. 부근 낙원상가에는 57세 이상은 2000원만 내면 하루 종일 영화를 볼 수 있는 ‘실버 영화관’도 개관했다. 이 영화관의 5월 상영작 선정 컨셉트는 ‘청춘을 돌려다오’다. 호국의 달인 6월에는 ‘대한민국 내가 지켰다’가 컨셉트란다. 어버이들이여 그동안 고생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이제 가정의 짐에서 좀 벗어나시라.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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