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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타락, 케인즈의 경고

중앙선데이 2009.04.25 20:39 111호 35면 지면보기
“한 사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수단 가운데 화폐의 타락만큼 교묘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케인스가 인플레의 위험을 경고하며 한 말이다. 실제로 중국의 장제스 정권이나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한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수퍼(超)인플레이션이었다. 당시 독일에선 하루에 물건 가격이 두 배씩 오르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수퍼인플레이션은 전쟁이나 혁명, 대규모 재정적자 등으로 화폐 발행이 남발되면서 발생하곤 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만 유례 없는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마구 찍어내고 있는 돈과 막대한 정부 부채가 결국 수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플레가 본격화된다면 정부와 기업의 대응은 불황기 때와 전혀 달라져야 한다.

국내외 여건을 종합해 볼 때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주요 선진국들이 금융시장 안정과 경기부양을 위해 대규모로 뿌려 놓은 유동성은 여전히 부실 처리에 급급한 금융권에서 맴돌 뿐 일반 가계와 기업에 대한 대출 증가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소비 수요가 부진하다 보니 주요국의 제조업 가동률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현재로선 공급 초과 현상 때문에 미국·유럽·일본, 심지어 중국까지 디플레(물가 하락)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는 물가상승률이 3%대로 비교적 높은 편인데 이 역시 수요가 회복돼서라기보다 원화가치가 떨어져 수입물가가 상승한 측면이 크다.

인플레 위험이 언제 들이닥칠지 불확실하지만 그 해법은 본격적인 경기회복 시 각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면 통화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가계·기업 대출이 다시 늘어나고 불황기에 미뤄둔 수요가 몰리면서 상품·서비스의 값을 밀어 올릴 수 있다.

이때 인플레를 막으려면 정부가 과감하게 이자율을 인상하고 돈줄을 죄어야 하는데 과거 경험을 보면 이것이 쉽지 않다. 경기회복 초기에는 이를 적시에 판단하기 어렵거니와 실업과 같은 경제적 고통이 지속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통화량을 줄이려면 성장 둔화나 실업 증가와 같은 부작용을 감수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제1차 오일 쇼크 때 긴축 정책을 머뭇거리다 타국에 비해 훨씬 높은 30% 가까운 인플레를 겪어야 했다.

자산가격의 인플레도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주식·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은 실물경제의 펀더멘털과 궤를 같이하는 게 보통이지만 과거 경험을 보면 숱한 버블의 역사가 반복돼 왔다.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인 미국의 부동산 버블도 2000년대 초 IT 버블 붕괴 이후 경기침체를 해소하기 위해 추진된 저금리 정책과 서브프라임 대출에 대한 위험 불감증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요즘 모든 나라가 경기를 살리려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가면 양상이 바뀔 수 있다. 경기회복을 유지하면서도 물가 상승이나 자산 시장의 과열을 막아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 성과에 따라 국가별 명암도 바뀔 수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과다한 인플레가 발생하면 우리의 국가경쟁력은 악화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당분간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되 장기적으로는 물가 상승, 자산 버블을 억제하기 위한 인플레 처방도 염두에 둬야 한다. 예컨대 최근 부동산 정책이 규제 완화 일변도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할 대목이다. 미국은 부동산 버블 붕괴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 당분간 버블이 재현될 가능성이 작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부동산 투기 가능성이 남아 있다. 정부로선 시장에 물가 안정 의지를 꾸준히 상기시켜 인플레 기대 심리를 사전에 억제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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