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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코리아]下. 남북정상회담 시도와 불발

중앙일보 1997.09.27 00:00 종합 5면 지면보기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이 비무장지대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백악관의 극소수 측근들만이 알고 지나쳐 버렸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카터는 잘 알려진대로 취임후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히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한 보고서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된다.


미국무부와 국방부, 주한미사령부 모두가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난색을 표하던 가운데 미정보당국의 북한군사력 재평가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보고서 작성 경위는 이랬다.


당시 29세의 정보분석관이었던 존 암스트롱은 75년 5월부터 미정보기관이 입수한 각종 정보를 취합, 정밀분석에 들어갔다.


그는 그해 12월 1차 보고서에서 북한의 탱크만 해도 미국의 추정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여섯명의 요원들이 추가배치돼 북한 특수부대의 기동성, 전진배치 화력등을 종합분석한 결과 77년 12월 최종보고서를 주한미사령부에 제출했다.


이때부터 카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미정부내 작업이 벌어졌고 '대통령 검토메모/NSC - 45' 라는 주한미군 철수방침 재고를 결정한 문건이 남게됐다.


한편 미관리들은 카터가 79년 6월 선진국 정상회담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서울에 들러 주한미군 철수안 재조정과 북한군사력 재평가를 주제로 한.미 정상회담을 가질 것을 건의했다.


카터는 참모들의 건의를 마지못해 수락했으나 권위주의적 지도자로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과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논하지는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던중 방한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침 카터는 방한길에 비무장지대에 남북정상을 불러모아 한반도 평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주선하고 싶다는 생각을 참모들에게 던져놓았다.


한해전 이집트와 이스라엘 정상간에 캠프데이비드회담을 주선, 성과를 거뒀던 카터의 기발한 착상이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를 비롯, 백악관과 국무부의 참모들은 남북한이 응하지 않을 회담을 제의해 미국이 웃음거리만 될 뿐이라며 이를 적극 만류했다.


결국 카터는 자신의 구상을 거둬들였지만 미국이 남북대화를 주선해 당사자간 문제해결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던 카터 대통령으로 볼 때 전혀 엉뚱한 구상은 아니었다.


이어 남북정상회담은 남북한 당사자간의 접촉으로 시도된다.


84년 겨울 크리스마스 다음날 미국거주 채닝 림 (張勉 정부당시 유엔근무, 군사혁명후 미국에 남아 정치학교수역임) 씨는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의 밀사로 평양을 찾았다.


이와는 별도로 장세동 (張世東) 국가안전기획부장은 85년 3월 청와대에 근무하던 박철언 (朴哲彦) 을 특별히 지명, 남북 고위접촉의 창구역을 맡기게 된다.


朴의 북측 대화상대는 한시해. 72년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여했고 이후 외교부장과 유엔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울과 평양에 직통전화를 개설하고 수시로 대화를 나눴다.


85년 5월과 91년 11월사이에 평양.서울.판문점.백두산.제주도.싱가포르등 장소를 옮겨가며 42차례나 만났다.


닷새동안 함께 지낸 적도 있지만 모든 회동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전두환대통령은 朴 - 한 비밀대화 창구를 이용해 남북정상회담을 누차 제의했으며 판문점을 제외한 어느 곳, 언제라도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어 허담과 한시해등 북측밀사 일행이 85년 9월4~6일 서울을 방문했고 평양에서 全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


허담은 서울에서 랑군사건을 거론하며 "남한이 북측의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면 정상회담은 없다" 는 경고성 발언을 남겼다.


全대통령은 김일성 생전에 함께 남북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음달인 10월 장세동과 박철언등 남측 밀사가 방북, 김일성을 만났고 全대통령의 조기정상회담 성사의지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북측은 불가침협약과 한.미 팀스피리트훈련 중지를 요구했으나 남측은 난색을 표했다.


10월 회동이후 조기 정상회담 전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남북 비밀접촉과 대화내용 전부를 파악하고 있었던 미국의 한 정보요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남북한은 말 구절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회담성격과 수준등을 표기하는 단어에서부터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북한은 정상회담을 진전시키는데 큰 흥미가 없었으며 남한 또한 북측을 자극하는 일을 벌이곤 했다.


" 결국 남북한 당사자간의 정상회담 구상은 全대통령의 팀스피리트훈련 확대실시 주장에 따라 20만명의 한.미 양국군이 참여한 가운데 비무장지대 인근지역에서 실시된 훈련으로 인해 결정타를 맞고 불발로 끝나고 만다.


정리 = 길정우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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