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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28.동의보감·사암침법·사상의학

중앙일보 1997.09.13 00:00 종합 13면 지면보기
개개의 생명이 시간에 연관된다면 문화유산에도 생명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문화유산은 생명을 잃고 역사의 박제 (剝製) 로 남게 되는 반면 어떤 문화유산은 지금까지도 살아 숨쉰다.


수백년, 수천년이 지나서 이제는 전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 현재까지도 살아 움직이는 문화유산은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강한 생명력을 가진 문화유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력의 관점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문화유산은 한글이다.


한글이 없는 우리의 문화수준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한글은 분명 인류문화사에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문화유산이다.


두번째는 한국음식이다.


두 문화간의 간섭과정에서 수준이 낮은 문화는 도태된다.


해외에 사는 교포들도 서양식 집에서 양복을 입고 살아도 몸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형성하는 음식만은 수준 높은 한국음식을 먹는다.


세번째가 한국의학이다.


현대 서양의학이 보급되면서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의 전통의학은 대부분 사라졌다.


단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전통의학이 생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가지 문화유산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 를 따른다는 것인데, 이 자연의 이치란 다름아닌 음양오행이다.


한글을 만든 이치를 설명한 '훈민정음' 제자해 (制字解) 의 첫 문장은 "천지의 도 (道) 는 오직 음양오행일 뿐이다" 고 기록돼 있다.


한국음식의 특징은 '양념' 이다.


양념은 본래 '약념' (藥念) 으로서 '약을 짓는 생각' 이다.


한국음식은 한국의학에서 약을 처방하는 이치를 따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학은 한글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음양오행을 따르고 있다.


음양오행은 자연의 변화를 인식하는 틀이다.


음양은 낮과 밤, 오행은 계절의 변화를 상징한다.


지구 위의 모든 존재는 이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긴 시간의 잣대로 보면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문화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남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문화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 있어서 이제는 세계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의학에서 꼭 세가지 문화유산을 든다면, 필자는 '동의보감 (東醫寶鑑)' 과 사암침법 (舍岩鍼法) , 그리고 사상의학 (四象醫學) 을 서슴없이 꼽는다.


지난 6백년간 국내에서는 수많은 의학서가 간행됐다.


그중에서도 조선 세종때 간행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85권과 '의방유취 (醫方類聚)' 2백66권은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25권 (3천1백46쪽) 밖에 안되는 '동의보감' 을 글자 그대로 보배로 손꼽는 것은 동양의학의 진수가 효율적인 체계로 편찬됐기 때문이다.


'동의보감' 은 허준 (許浚.1546~1615) 선생이 자신의 의학이론과 처방을 저술한 것이 아니다.


'동의보감' 은 당시까지 나온 모든 의학관련서의 내용을 선별해서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만들고 나아가서 출전을 밝혀놓았기 때문에 그후로 지금까지 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두운 밤길에 횃불을 얻은 격이었다.


서자로 태어나서 어의 (御醫)에까지 오른 허준선생은 선조께서 승하하자 그 책임을 지고 2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14년 동안의 위대한 작업은 이렇게 유배지에서 마무리됐다.


허준선생의 일생은 한마디로 '성 (誠)' 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의학' 은 중국의학이 아니라 '동의 (東醫)' 라고 당당히 천명할 수 있었을까.


침 (鍼) 이란 '기 (氣)' 를 조절하는 방법이다.


기가 균형을 잃는 것을 조절해서 균형이 회복되면 병이 낫는다.


침법의 종류는 다양하다.


필자는 그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이 사암침법이라고 생각한다.


파열된 무릎연골이 회복되는 것도, 척추디스크로 수술판정을 받은 환자가 완쾌되는 것도 이 사암침법의 치료효과다.


이 침법은 사암도인 (舍岩道人) 이 만들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四溟大師) 의 수제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사암도인 침구요결 (鍼灸要訣)' 이라는 조그만 책 한 권만 전해오고 있다.


음양오행의 상생 (相生) 과 상극 (相剋) 을 절묘하게 운용하여 보사 (補瀉.부족한 것은 더하고 넘치는 것은 더는 것) 의 효과가 신묘하게 나타나게 하는 사암침법의 창의성은 아무리 오래 생각해도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4백년전의 사암도인의 창작 (創作) 이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서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고 있는 것이다.


허준선생 이후 3백년이 지나서 이제마 (李濟馬.1836~1900) 선생이 사상의학을 창시했다.


그의 독창적 인간철학이자 사회철학인 '격치고 (格致藁)' 에 체질의학을 더한 것이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이다.


동서고금에 체질에 관한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동의수세보원' 에서와 같이 체질의 철학.생리.병리.진단.치료법을 갖춘 경우는 없었다.


사상의학은 심신 (心身) 의학이면서도 마음을 더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사상의학의 핵심은 마음이다.


'동의보감' 에 의해 확고한 틀을 갖춘 한국의학은 다시 '동의수세보원' 에 의해 중국의학과 차별되는 심신의학으로서 그 수준을 높이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사상의학이 만들어진 시기인 1876년 일본에서는 법으로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서양의학을 필수로 할 것' 을 강요하며 전통의학의 맥을 끊어 놓았다.


위의 세가지 문화유산의 공통점은 '살아있다' 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의 생명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이 생명은 '문화의 주체' 인 '사람' 으로부터 나온다.


그 첫째는 '사랑' 이다.


허준선생과 사암도인과 이제마선생이 백성을 깊이 사랑했던 마음, 곧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둘째는 창의 (創意) 이다.


창의는 머리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서 절실해질 때 하늘에서 주는 것이다.


'훈민정음' 제자해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아아, 정음 (正音) 이 만들어짐에 천지만물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는 아마도 하늘이 임금님의 마음을 열고, 솜씨를 빌려주신 것이 아닐지. " 셋째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위의 세 선인들의 삶은 눈앞의 사심 (私心) 과 욕심을 걷어내는 실행을 일생동안 지속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명호 <비로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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