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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짚기>극장영화 자막도 못미더워

중앙일보 1996.12.28 00:00 종합 42면 지면보기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LA의 황량한 공터.형사 알 파치노가 갱 로버트 드니로를 뒤쫓는다.노련하지만 이젠 깊은 주름이 파인형사와 탈출을 결심한 늙어버린 갱이 최후의 대결을 벌이고 있다.아무도 믿지 않고 오직 스스로 체득한 뒷골목의 생존 원칙에 따라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종족임을 감지하고 있다.마침내 파치노의 총에 드니로가 쓰러진다.파치노가 다가갔을 때 거친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드니로의 한마디.“다시는(감옥으로)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었지(I tol d you I'm never going back).” 지난 여름 개봉돼 꽤 많은 관객을불러모은 영화.히트'의 마지막 장면이다.이 장면에서 떠오른 자막은 드니로의 대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자넬 먼저 쏠 수도있었어”였다(비디오에는 제대로 돼 있다).이 자막은 충분히 시비거리가 된 다.이 영화에서 두 사나이의 캐릭터는 할리우드 장르영화(특히 서부극과 갱영화)의 전통적인 남성성에 기대고 있다.그들이 내면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유일한 죄악은 범법행위가 아니라 배신이다.그들에게 동정은 모독이며 치욕이다.보안관 팻 개릿은 자신이 존경하는 친구인 무법자 빌리 더 키드를.기꺼이'죽인다(샘 페킨파 감독,.관계의 종말').

.히트'는 사라져가는 남성영웅들의 허무주의적 숙명론을 훌륭하게 계승함으로써 묵직한 비장미를 얻을 수 있었다.그러나.의역'된 이 마지막 대사는 두 영웅의 운명적 대결을 갑자기 감상적 신파극으로 만들어 버린다.영화평론가 김정룡씨는 다소 흥분한 어조로“이건 의역으로 볼 수 없다.작품에 대한 모독이다”라고까지말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바로 흥행 때문이다..히트'의 번역자 조상구씨는 이렇게 말한다.“영화자막은 많은 대사를 짧고 선명하게 전달해야 한다.모호하거나 밋밋해 보이는 대사는 관객의 머리에 쏙 들어오게 고치지 않을 수 없다.물론 이건 흥행 을 고려한 영화수입사의 주문이기도 하다.이는 오역이 아니며 오히려관객들을 영화속으로 깊숙이 끌고 들어가는 구실을 한다.”조씨는주간지“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레옹'의 마지막 대사“넌 내인생의 등불이었어”도 영화의 분위기에 맞 게 자신이 첨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흥미위주로 대사 윤색.오역 잦아

.흥행을 위해'번역자에게 자의적인 윤색을 하도록 권유하는 것은 일반화된 관행이다.한 영화사의 마케팅 담당자 K씨는“예술성높은 영화나 정통 드라마일 경우 직역을 권장한다.그러나 상품성높은 액션물은 10~20%를 우리 정서에 맞게 윤색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외화번역이 전적으로 정확하기를 기대하기는 무리일지 모른다.한장면에 14자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조건에서 온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예컨대 우디 앨런의 코미디처럼 여러명의 등장인물들이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놓는 장면은 전체적인 흐름 만 이어가도록 자막을 만드는게 그나마 최선이다.

.히트'의 번역 사례는 대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아닌 의도된 윤색이라는 점에서 .신종 오역'이라 할만하다.영화산업에 마케팅 전략이 일반화되면서 대사 한마디라도 웃기거나 자극적인 문구를 넣어 관객의 시선을 끌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문제는 그런 윤색이 작품의 톤과 맥락에 대한 충분한 고려없이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자넬 먼저 쏠 수도 있었어”나“넌 내 인생의 등불이었어”는.신파화'를 겨냥한 대사지만,상업적 윤색의 가장 보편적인 전략은 유행어와 속어를 동원한.개그화'다.

“정주영보다 돈이 많아요”(.포레스트 검프'),“날 또라이 경찰로 보는거야?”“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겠군”(.원초적 본능')“그게 틀리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센스,센서빌리티')“박봉에 뺑이치는 웨이터…”(.펄프 픽션')“똥오줌을 못가리고 헤맨다”(.저수지의 개들')등 사례를 들자면 무수히 많다.

번역작가 박찬순씨는“관객들의 말초적 자극을 위한 유행어와 비어가 너무 남용된다.의미를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해도 이런한국식 유행어와 비어는 원작의 톤 전달을 방해하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번역의 상업적 윤색 경향이 부작용만 낳는 것은 아니다.영화홍보전문회사인 A사의 N실장은“번역에까지 마케팅 개념을 도입하려는 노력 덕택에 번역의 정확도는 전체적으로 높아졌다”고 진단한다.경쟁적으로 실력 있는 번역자를 기용하고,번역료 도 높게 책정하는 경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상업적 윤색보다 더 큰 문제는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거나 엉뚱한 의미를 전달하는 전통적 오역이라는 지적도 있다.박찬순씨는“극장 개봉작에는 이런 오역이 많이 줄었지만 비디오와 유선방송의 영화는 여전히 오역 투성이”라고 말한다.빈약 한 번역료 관행이 변하지 않는 한 원작과 거리가 먼 자막으로 작품을 이해해야 하는 한국 관객들의 신세가 많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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