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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누나들이 떴다 오빠부대 비켜

중앙일보 2008.03.06 15:06 주말섹션 1면 지면보기
공연장을 나서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뭔가에 마음을 내줄 때 삶은 그만큼 가뿐하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장.
중학교 땐 ‘소방차’의 팬이었습니다. “아이 러뷰, 아이 니쥬, 아이 워나 홀주(I love you, I need you, I wanna hold you).” 오빠들의 노래를 ‘마이마이’로 들으며 공개방송 현장을 쫓아다녔습니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은 브로마이드와 잡지를 사는 데 썼습니다. 엄마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문화판 흔드는 30대 여성 ‘팬덤’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인기더군요. 조던 나이트를 직접 만나러 보충수업비 4만원을 털어 산 티켓을 들고 잠실 체조경기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공연장에서 관객들에게 밀리면서‘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데뷔 무대에서 전문가들에게 7.8점이라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서태지와 아이들’. 어르신들은 “이게 음악이냐” 했지만 “왜 바꾸지 않느냐”고 외치던 그들은 한국의 대중음악사뿐 아니라 나의 영혼까지 바꿔놓습니다.



‘H.O.T’‘젝스키스’가 등장할 즈음에는 노는 데 바빠 신경을 못 썼고요. 대학을 졸업하고는 일본 아이돌에 빠졌습니다. 기무라 다쿠야를 통해 꽃미남 공장 ‘자니즈’(일본 대형기획사)를 알게 됐고, 퇴근 후엔 인터넷으로 후지TV를 봤습니다. 일본어를 영어보다 잘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뮤지컬 세상에 빠져 삽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걸출한 ‘남동생들’ 만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지요. 일주일에 사나흘은 공연장에서 보냅니다. 서태지 15주년 기념 앨범 사랴, 일본 그룹 스마프(SMAP)가 표지로 나온 잡지 사들이랴, 뮤지컬 ‘쓰릴 미’ 반복 관람하랴, 지난해엔 연봉의 4분의 1이 ‘팬질 비용’으로 나갔네요.



누구는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즐겁습니다. 네, 얼마 전 서른넷이 되었습니다. 저랑 함께 30대 ‘빠순이’의 세계로 들어가 보실까요.



(아, 빠순이요?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여성들을 뜻하는 거 아시죠).



글=이영희·홍주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동할 뿐 1일 오후 7시 가수 이승철의 전국투어 콘서트가 열리는 성남아트센터 앞, 30대 여성 여러 명이 포스터, 야광봉 등을 챙기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승철의 공식 팬클럽 ‘새침떼기’ 운영진들이다. 1990년대 초반 창단한 새침떼기는 당시 10대였던 지금의 30대 여성들을 주축으로 15년 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장수 팬클럽이다. 회장 고혜영(37)씨는 “활발하게 모임에 참여하는 500여 명 중 대부분이 10년 이상 된 팬들”이라고 했다. 이문세, 이승환, 신승훈 등 10년 넘게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에게는 대부분 이처럼 30대 이상이 대다수인 ‘가족 같은 팬클럽’이 존재한다. 가수 박진영은 최근 컴백 기념 콘서트에서 “데뷔 시절 콘서트에 온 팬들에게 ‘10년 후에도 이 자리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약속을 지켜준 팬이 많아 기쁘다”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요즘 대한민국 문화계는 30대 여성들의 ‘팬심’과 ‘머니(money)’를 먹고 자란다. 30대 여성 ‘파슨스’(빠순이를 칭하는 인터넷 용어)들의 취향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문화계의 지형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다. 1980~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성장기에 10대를 보낸 이들은 ‘소방차’ ‘서태지와 아이들’에 분출했던 열정을 또 다른 스타, 다른 영역으로 이어가며 새로운 ‘팬질(적극적인 팬 활동)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은 “팬질에 필요한 것은 열정과 소비력인데, 지금의 30대는 대중문화를 맘껏 향유한 첫 세대인 동시에 두둑한 지갑을 지닌 거대한 소비집단”이라고 말한다.



30대의 팬질은 ‘과거의 우상’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10대부터 아이돌 문화에 익숙했던 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아이돌의 ‘누나 팬’ ‘이모 팬’으로도 적극 활동한다. SM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의 열성 팬 중 절반 정도는 20대 후반~30대 여성들이다. 이들은 지난해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동방신기의 드림콘서트에서 ‘30대도 시아홀릭’‘이모 왔다 카만있어 동방신기’ 등의 현수막을 내걸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들의 팬질은 국경과 영역을 넘나든다. 90년대 말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1세대이기도 한 이들은 ‘스마프(SMAP)’‘아라시’ 등 일본 연예인의 팬클럽을 인터넷상에 만들어 적극 활동한다. 일본에서 발매된 CD, DVD 등을 공수해 오는 것은 물론, 그들이 출연한 드라마, 쇼 프로의 자막을 만들어 팬끼리 공유하며 즐긴다. 뮤지컬은 최근 새롭게 ‘30대 팬덤’의 주무대로 떠오른 분야다. 청강문화산업대 뮤지컬학과 이유리 교수는 “현재 뮤지컬 관객의 80% 이상이 30대 여성들”이라며 “이들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로맨틱 코미디물의 범람, ‘꽃미남’ 남자배우 캐스팅 열풍 등 한국 뮤지컬만의 독특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돈을 쓸게, 기쁨을 줘 이달 초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의 고가 생일선물 논란에도 30대 팬들의 힘이 보태졌다. 팬들로부터 최고 사양의 노트북과 디지털카메라, 야마하 신디사이저 등 1000만원대에 달하는 선물을 받은 동방신기 측은 결국 이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준기의 인터넷 팬클럽 ‘하늘 아래 준기 세상’은 2006년 이준기의 생일에 700만원에 달하는 대형 TV를 선물했다.



안정적인 직장과 고정수입을 갖고 있는 30대 팬들에게 팬질에 쓰는 돈은 소비생활의 중요한 일부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한 달에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과감히 지출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뮤지컬 매니어인 이은혜(30)씨는 보통 한 달에 100만원 정도를 뮤지컬 보는 데 쓴다. “좋아하는 배우의 ‘전관’(한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을 모두 관람하는 것)을 뛰면 보통 한 달에 한 공연을 15회 정도 보게 된다. 거기에 새로 나온 뮤지컬 ‘단관(단체관람)’ 등을 포함하면 어떤 주는 월요일 빼고 매일 공연장을 찾는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즐기는 30대 여성들의 팬덤은 ‘팬질 여행’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본 아이돌그룹 아라시의 팬인 프리랜서 번역작가 김모(35)씨는 최근 일본 도쿄(東京) 오모테산도힐즈에서 열리고 있는 아라시 멤버 오노 사토시(大野智)의 피규어 전시회에 다녀왔다. 그는 “전시회 관람이 주 목적이었지만 도쿄 관광을 겸해 3박4일간의 일정으로 머물다 왔다”며 “매년 일본에서 열리는 아라시 콘서트에 갈 때마다 보통 티켓 가격을 포함해 100만원 이상 든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본의 톱스타 기무라 다쿠야(木村拓哉)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을 당시 팬들이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호텔에 묵으며 내한 일정을 함께하기도 했다. 뮤지컬 팬들 역시 한국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작품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직장인 송미영(32)씨는 “‘위키드’를 보기 위해 일본을 다녀왔고, 뉴욕과 런던에 갔을 때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매일 한 편씩의 뮤지컬을 봤다”고 말했다.



‘팬덤’을 넘어 ‘팬컴’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30대 팬들은 직장생활에서 쌓은 전문성을 팬질에서도 발휘한다. 이들에게 스타는 단지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연예인의 생일, 영화 개봉일 등에 팬클럽 이름으로 언론사에 ‘우리 OO,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떡 상자 등을 돌리는 것은 이미 오래된 얘기다. 드라마나 영화가 시작되면 팬클럽 자체적으로 홍보 전단지·기념품 등을 만들어 길거리 홍보활동을 펼친다. 최근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종영되자 배용준의 팬들은 사비를 모아 ‘우리나라 드라마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라는 내용의 광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단순한 팬들의 집단인 팬덤을 넘어 연예인의 소속 회사가 해야 할 일을 팬들이 대신하는 ‘팬컴(Fan Company)’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화 수용자에 그치지 않고 직접 문화를 만들어가는 문화 생산자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뮤지컬 동호회인 ‘뮤지컬매니아’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노래·댄스를 직접 배워 2주마다 한 번씩 공연하는 소모임이 활발히 운영 중이다.



30대 팬덤을 ‘철이 덜 든 행동’으로 치부하는 시선에 이들은 때로 고민한다. 최근 인터넷에서 떠돌았던 ‘유승호(‘태왕사신기’의 배용준 아역) 찬가’는 ‘이모 팬’ ‘누나 팬’들의 심리적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장동건만 되었어도 떳떳하게 밝히련만/배용준만 되었어도 웃으면서 말하련만/어찌하여 아역배우 유승호에 꽂혔을꼬/2차 성장 사춘기 때 사고쳤음 아들일세’.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팬질에 당당하다. 이진영(35)씨는 “‘나이에 걸맞은 행동’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강박관념 아니냐”며 “나에게 팬질은 삶의 활력소이자 새로운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적극적인 취미생활”이라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때로는 남자도 ‘미친다’



 CBS 라디오(93.9 MHz)의 ‘그대와 여는 아침 김용신입니다’(오전 7~9시 방송)를 진행하는 김용신 아나운서는 유달리 남성 팬이 많다. 이 프로그램에 오는 휴대전화 문자와 인터넷 게시판 사연은 하루 1000여 통. 이 중 절반 이상이 30~40대 남성이 보낸 것이다. 남성 청취자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아내가 갱년기를 겪고 있는데 연애 시절 듣던 노래를 틀어달라”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렸다. 출근길이 힘들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미역국을 끓여줬다”. 선물을 보내는 남성들도 왕왕 있다. 아침 7시에 케이크를 사 들고 오는 30대 남성, 따끈한 커피를 배달시키는 40대 직장인 등이 그들이다. 김 아나운서는 “방송에서 의자가 차갑다고 말했더니 남성 팬이 전기방석을 보내더라”며 “몇 년 전에 비해 3040 남성들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김용신 아나운서
3040 남성들도 ‘팬질’에 동참하고 있다. 지난 한 해를 달구었던 댄스그룹 ‘원더걸스’의 열풍이 그 시작이었다. 넥타이 맨 남성들이 사인회에 참석하고 편지·선물을 보내는 등 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라디오·공연·연예인 등 열광하는 분야도 다양해졌다.



SM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10대 소녀들로 이루어진 댄스그룹 ‘소녀시대’의 팬 중 절반이 20~30대 남성이다. 이 회사 김은하 과장은 “예전에는 소녀 그룹의 팬 모임에서도 성인 남자들을 찾기 힘들었다. 요즘은 ‘아저씨 부대’가 사인회에 줄을 서고 멤버들에게 값비싼 선물도 보내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녀 그룹 ‘원더걸스’의 팬도 상당수가 30대 이상 남성이다. JYP의 한수정씨는 “남성 팬들의 선물 공세도 상당하다. 어떤 30대 한의사는 멤버들 하나하나에 맞는 한약을 보내왔다”고 전했다.



남성들의 팬 문화는 여성들과 다른 점이 많다. 김용신 아나운서는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남성들도 직장과 가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라디오 DJ를 열광의 대상보다는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소득이 늘어나고 개방적인 남자들이 늘면서 남성들의 팬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여자들에 비해 몰입 정도가 낮고 팬 활동에 쓰는 돈도 많지 않다”고 말했다.



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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