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론] 차기 정부의 거울은 참여정부

중앙일보 2008.01.08 20:43 종합 35면 지면보기
참여정부의 퇴장이 눈앞에 다가온 새해 벽두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했던 최우선 국정과제의 하나가 과거사 정리였을 만큼 참여정부의 정책기조 중심에 역사 문제가 있었다.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위원회’ ‘친일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주 4·3 진상규명위원회’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위원회’ 등등. 참여정부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는 19세기 말에서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모두 헤아리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과거사 정리를 통해 이로부터 비롯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고 진실을 밝힘으로써 과거 잘못의 재발을 방지하는 소중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는 자찬과 달리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은 역사기억을 둘러싼 ‘내전(Civil War)’의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에 난 균열을 메우기보다 오히려 더 크고 넓게 벌리고 말았다. 심지어 피아와 선악 구분이 명확한 도덕률(moral politics)에 입각한 참여정부의 역사인식은 대외정책마저 민족통일에 대한 저해 여부를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우를 범하게 만든 원인으로 기능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때 거기를 산 이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이 바라는 내일이 어떠한지를 살필 수 있는 시금석이다. 그렇기에 역사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시민사회가 당면한 현실 과제를 푸는 키워드이자 미래 진로를 비추는 등대로 다가선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코앞에 둔 지금, 참여정부의 과거사 청산작업은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나 정치집단의 잘못된 역사인식이 어떠한 결과를 자아내는지를 명증하는 역사의 경고이자 반면교사로 다가선다. 이로부터 새 정부는 무엇보다도 학문을 정치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참여정부의 과거사 청산의 논리는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이 하나 되는 민족 통일과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한국 사학계의 민족·민중주의 담론에 힘입은 것이다. 참여정부는 권력에 거리를 두어야 할 학자들을 과거사 관련 각종 위원회 소속 공무원으로 동원했고, 권력에 동원된 학문은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우를 범하게 되었다. 민족·민중주의 역사 해석은 정치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억의 정치’에 부역한 권력담론이 돼 버렸다. 그러나 어떠한 명분으로도 국가권력이 역사기억을 신화화하거나 독점화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 한국의 시민사회는 계몽이 필요한 우중(愚衆)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적이며 각성된 주체로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념의 시대가 종언을 구하고 제3의 길, 신중도 등과 같은 창조적 융합의 시대로 전 세계가 전진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식적 역사 쓰기의 철 지난 산물일 뿐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말하는 ‘민중혁명 필연론’은 사회주의 실현을 더 이상 반드시 구현돼야 할 역사적 진보나 필연으로 보지 않는 냉전 붕괴 후 신좌파의 지적 흐름에 견주면 명백한 시대착오인 것이다. 또한 이미 지향과 이해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다원적 시민사회와 피부색과 문화를 달리 하는 이들이 더불어 사는 다인종·다문화의 사회로 진화한 오늘에 있어서의 민족주의는 우리 안의 타자를 차별하는 탄압의 기제로 잘못 쓰일 수 있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은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시대인 하나라에 있다(殷鑑不遠在夏后之世)”는 옛 경구를 임기 내내 되새겨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 학장·한국사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