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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원류를찾아서>6.혜초 求法의길인도

중앙일보 1995.01.15 00:00 종합 9면 지면보기
한때 인류 정신문명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물질문명에 뒤져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인도.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금세기에만 해도 시성(詩聖)타고르와 성웅(聖雄)마하트마 간디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성녀( 聖女)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뜻을 기리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수만명의 봉사자들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인도에서 성스러운 것이 어디 그뿐이랴.「그루」스승을 찾아 고행의 길을 나서는 은자(隱者)며,구걸하는 행려자에게서도 성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현대문명의 공해 속에 갇혀있는 우리가 잠시 해방되어 성스러운 태초의 분위기에 젖어 볼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서는 아마도 인도뿐일 것이다.

그 옛날 현장(玄장)과 같은 구법승들은 인도를 찾아 5년이고10년이고 걸리는 멀고도 험난한 구법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었다. 신라의 혜초(慧超)가 중국을 통해 인도에 갔던 것은 지금부터 근 1천3백여년 전인 서기 722년,그의 나이 18세때였다.인도행을 위해 그는 그보다 여러해 전에 홍안의 소년으로 중국에 건너가 뤄양(洛陽)의 廣福寺에서 인도 승려 不空 金鋼智로부터 불법과 인도어를 사사했다.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스승은 제자 金鋼智와 배를 타고 인도로 건너가게 했다.

우리 역사상 혜초 말고도 인도에 다녀온 구법승이 여럿 있지만우리가 유독 혜초를 기리는 것은 그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6년만에 귀환한 후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버금가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썼기 때문이다.불행히도 왕오천축국 전 3권은 일서가 되고 말았으나 1908년 프랑스 펠리오가 돈황의 석굴에서왕오천축국전의 초고본으로 보이는 필사본을 발견하고부터는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혜초의 족적이 알려지게 됐다.

비록 초고본일망정 왕오천축국전은 훌륭한 저작이다.혜초의 글은간결하나 뜻이 깊고 그의 시는 그보다 여덟살 아래였던 두보(杜甫)만큼이나 뛰어나다.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곧장 석가모니가 입적한 쿠시나가르에 가 참배한 다음 부처가 처음잊 로 법륜(法輪)을 굴렸다는 바라나시의 사라나트에 당도하였다.그는 불교 유적이 많이 파괴되고 불교가 많이 쇠퇴하여 변질되고 있는 모습을 개탄하였다.

보리(菩提)가 멂을 염려하지 않거늘 어찌 녹원(鹿苑)이 아득하다 하리오.

다만 근심함은 걸린 길이 험난함이요, 업보(業報)의 바람이 거셈을 생각함이 아니로다.

팔탑(八塔)은 살펴보기가 어렵나니 삼저경(參著經)은 전란에 타버렸도다.

그 누가 염원하는 바를 채우리오.

눈을 들어보니 오늘 아침이 있도다.

석가가 성불한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에서 밤을 지새우며 선(禪)을 하고 난 혜초는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인근에있는 날란다대학에 입학하려던 꿈을 유유히 포기하고 유랑의 길에오른다.5세기에 건설된 이 날란다대학은 현장이 방문했던 7세기만 해도 1만5천명의 학생이 1천2백명의 교수와 함께 공부했던세계 최대의 불교대학이었다.

***날란다大 입학 포기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왕오천축국전 초고본에는 이 날란다대학에 대한 언급이 없다.혜초가 왔을 때는날란다가 이미 거세게 밀어닥친 아랍 세력과 힌두교의 영향에 많이 변질되어 실망했던 것일까,아니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던 이 대학의 입학 시험에 혹시 낙방했던 것일까.

***수 백년간 기습을 일삼으며 불교 유적을 닥치는대로 파괴하던 아랍 세력은 13세기에 들어와선 전 인도를 손아귀에 넣고만다.날란다대학도 그 와중에 처참하게 파괴된 채 흙더미 속에 묻혀 있다가 5백년 후에야 발굴되었다고 한다.날란다의 폐허 속을 이리저리 걷던 나는 안내인에게 날란다대학의 역사에 그 옛날이곳에 왔던 한국인 혜초의 이름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아,혭이라는 분이었습니다만….』 혜업(惠業)을 일컫는 말이었다.혜초의 이름이 날란다 역사에 나오지 않고 왕오천축국전에 날란다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혜초는 날란다와 인연이 없었나보다. 아무튼 당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불교에 크게 실망한혜초는 남인도와 서인도를 두루 돌아본 다음 카슈미르 지방을 거쳐 귀국길에 오른다.카슈미르에서 인더스 강줄기를 거슬러 눈덮인히말라야 협곡으로 들어가 아프가니스탄의 산협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이를데 없다.여름이면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는 중앙아시아 사막지대는 어떻게 건넜으며,눈보라 휘날리는파미르 고원의 고봉준령은 어떻게 넘었을까.

***수년 걸린길 하루에 중국을 떠난지 6년만에 혜초는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들을 두루 돌아보고 서기 727년 12월 하순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에 도착하였다.쿠차에서 돈황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는 데만 족히 1년은 걸렸을 게다.돈황에서 왕오천 축국전을 집필하고 장안을 거쳐 낙양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몇년이 걸렸을까.

오늘날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그 옛날 몇년씩이나 걸리던 여정이단 하루로 단축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우리가 혜초와 같은 구법승들의 발자취를 아직 찾고 있는 것은 그가 남긴 구법의 행적이세속에 찌든 우리의 삶에 비해 너무나도 진실하 고 거룩하기 때문이다.여기에 우리가 그가 남긴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의발자취를 찾아가려는 소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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