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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그 이상의 무엇 지닌 내 사랑

중앙선데이 2007.09.22 16:05 28호 31면 지면보기
신의 아들들을 빼면 대한민국 남자는 대부분 군생활을 마쳤다. 지긋지긋했던 군대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민감했던 젊은 날의 몇 년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처럼 남아있을 게다. 가끔 고속도로 휴게소의 잡상인이 파는 군용품을 기웃거린다. 나뿐 아니라 문득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의 행동엔 처절했거나 아름다웠던 군대의 향수가 깔려 있다. 모든 계층을 동류의식으로 묶어주는 유일한 체험의 공감대를 지닌 특수한 나라, 이 지점에서 새로운 무엇(?)이 탄생될 개연성은 없는 것일까.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미로(MIRRO)’ 휴대용 주전자

1977년 군에 입대해서 지급받은 알루미늄 수통은 1945년에 만든 ‘미로(MIRRO)’의 제품이었다. 몸체는 찌그러져 움푹 들어갔고 부식된 표면은 버짐으로 얼룩진 살갗 같았다. 내게 오기까지 수백 명 이상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다. 이 수통에 입을 대고 물 마셨을 사람의 역사가 곧 현대사의 내용일지 모른다. 신형 플라스틱 수통을 지급받고 즐거워했던 동료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역사가 새겨진 물건의 존재감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였으니. 7월의 열기와 타는 목마름을 식혀준 ‘미로’ 수통으로 난 미국의 실체와 처음 만났다. 이젠 구할 방법이 없는 1945년제 ‘미로’ 수통은 꼭 가지고 싶은 물건 리스트에 올라 있다.

제대 후 ‘미로’의 제품은 아웃도어 라이프의 친구로 자리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미군용 식기를 납품하던 ‘미로’다. 시간을 통해 확인된 튼튼하고 기능적인 ‘미로’의 신뢰감은 어떤 경우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히말라야 등반을 계획하던 내가 ‘미로’의 휴대용 주전자를 사들인 것은 당연했다.

가벼운 알루미늄 재질은 화학 변화를 일으키지 않아 식용 용기로 적당하다. 돌출 부위를 없앤 몸체는 휴대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디자인이다. 물의 통로인 주둥이의 각도, 양쪽으로 접히는 굵은 철사 손잡이, 단순함에서 풍기는 선의 강직함은 남자의 지향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필요한 최소한의 높이와 폭으로 마무리한 비례감은 실용성과 아름다움의 접점이다.

안에 소형 가스버너 하나를 넣으면 가장 콤팩트한 차 마시기 준비가 끝난다. 이 주전자로 끓인 커피로 많은 사람과 우정을 쌓았고 더 큰 세상을 보았다. 따뜻한 차 한잔에 얼마나 큰 행복이 담길 수 있는지 알려준 것도 ‘미로’의 휴대용 주전자다. 누군가 약간의 수고를 자처하면 모두의 즐거움은 몇 배나 커지는 법이다.

20년 넘게 사용했던 이 주전자는 최근 여행 도중 도둑맞았다. 배낭에 함께 넣어둔 현금과 귀중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이 담긴 ‘미로’와의 인연은 대치될 방법이 없어 섭섭하다. 애정과 인격을 부여할 만큼 좋아했던 ‘미로’, 떠나가야 확인되는 사랑은 사람의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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