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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正祖의 르네상스’ 21세기로 通하다

중앙선데이 2007.09.16 02:52 27호 5면 지면보기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성대한 화성 행차를 벌였다. 수원 현륭원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었고, 선친이 살아있었다면 동갑인 모친 혜경궁과 함께 회갑 잔치를 벌였을 터였다. 화성 행차는 정조의 효심을 드러낸 것임과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왕권을 확실히 펼쳐 보일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당시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가 1만 명 정도였는데 행사에 동원한 군사가 5000여 명이었으니 정조가 이 잔치에 기울인 정성을 알 수 있다. 당시 행사를 15m 두루마리에 기록한 ‘화성원행반차도’의 일부. 사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
조선의 18세기는 참으로 독특하다. 오늘날 한국인의 감각에 맞는, 읽힐 수 있는 문화현상은 거개 18세기의 산물이다. 예컨대 박지원과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 이옥, 그리고 정조는 모두 18세기의 인물이 아닌가.

이전 시기인 17세기에는 이런 인물과 문화가 없다. 17세기는 기나긴 전란의 연장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래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 이듬해인 1637년 청(淸)에 항복함으로써 마감되는 전란은 무려 46년에 걸친 것이었다. 이 반세기에 이르는 전란 도중 조선 전기 사회가 쌓아올린 문화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8세기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인바, 그 시작인 영조 즉위년, 곧 1724년은 1637년 호란이 마감되고 난 뒤부터 계산해 87년 뒤다. 이때에 와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현상이 출현한 것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와서 비로소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정조는 글 읽기를 좋아한 공부하는 군주였다. 정조 시대에 간행된 책이 판본과 사본을 합해 154종에 달했다.
전란 상처 딛고 사회·경제적 안정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경제적 토대는 특히 중요한 요소다. 정확한 통계수치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여러 선학들이 지적한 것처럼 대동법과 균역법 등의 실시로 인한 수공업상·상업상에서의 상당한 발전과 부의 축적, 그리고 농업에 있어서 경작법과 경영방식에 일어난 변화 등은 사회적 생산량을 상당히 늘렸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경제적 잉여는 대부분 서울로 집중되었다. 조선은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였고, 조선 후기는 정치권력이 서울로 더욱 집중되었으므로 자연히 경제적 잉여 역시 서울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홍재전서』중의 ‘군서표기’ 한 종을 뽑아서 만든 단행본의 영인본.
이러한 서울로의 경제력 집중, 그리고 화폐경제의 발달을 두고 18세기 후반의 관료이자 문인이었던 남공철(南公轍)은 ‘서울은 오직 돈으로 살아간다’고 간명히 지적한 바 있다. 이 경제적 잉여의 집중으로 출현한 문화현상을 하나 꼽으라면, 중인(中人)과 경아전(京衙前)의 문화, 곧 ‘여항문화(閭巷文化)’가 있다. 18세기가 되면 의원·역관·계사 등을 중심으로 한 중인과 서울 소재 관청의 하급 관리인 경아전들의 문학예술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진다. 이들 중 어떤 축들은 음악(노래)에 몰두해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같은 시조집을 엮는가 하면(시조는 원래 노래 가사였다), 한시를 즐기는 축들은 모여서 시사(詩社)를 결성해 『소대풍요』 『풍요속선』과 같은 한시집을 엮기도 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그림과 글씨의 창작자로 등장한다. 이런 현상은 넓게 보아 이들이 섭취한 경제적 잉여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보다 중요한 변화는 양반층에서 일어난 것이다. 예컨대 문학에서 치밀한 묘사에 바탕을 둔 이덕무의 서정적 산문, 상대주의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박지원의 소설식 문체는 전에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언진 시의 자의식 탐구, 이옥 시의 시정적(市井的) 성격 등도 모두 처음 보이는 것이다. 정약용의 저 장대한 경전(經傳) 연구,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와 같은 엄청난 분량의 생활 실용서의 편집, 갑자기 중국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는 박제가의 『북학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빠진 유금(柳琴), 그리고 천주학을 진리로 받아들여 목이 잘린 사람들! 그런가 하면 서양의 악기인 ‘양금’까지 시울 시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왕으로서 세종에 버금가는, 아니 어떤 점에서는 세종을 능가하는 학자 군주 정조(正祖)가 있다. 그는 규장각이란 왕립 학술원을 만들고, 경사강의(經史講義)를 열어 경전에 관한 학술 토론을 주도했다. 또 교서관을 규장각의 부속기관으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책들의 출판을 관장했다.

베이징에서 들어온 선진 문물이 자극제

이런 독창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이 18세기에 갑자기, 그것도 18세기 후반에 집중돼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과거의 방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바깥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바깥이란 중국이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청과의 관계가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경영에 자신을 가지게 된 청은 18세기에 들어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치세(治世)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문화적으로도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이 바로 그 상징이라 하겠다. 베이징(北京)은 거대한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 중국 강남의 책들은 베이징으로 몰렸고, 베이징 유리창은 거대한 도서·예술품 시장으로 성장한다. 이제 청은 조선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베이징에 파견되는 조선 사신들의 시내 출입이 가능했다. 유리창을 찾아가 거대한 서적 시장을 보았고, 천주교당을 방문해 서양 선교사를 만났다. 서양 소식과 유리창의 서적은 18세기 들면서 조금씩 흘러들어오다 1765년 홍대용의 베이징 방문 이후부터 봇물이 터진 것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홍대용 이후 베이징의 지식인들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대륙의 새로운 학문과 예술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베이징에서 쏟아져 들어온 책과 지식은 과거 조선이 경험하지 못했던 파천황적인 것이었다. 천주학과 서양 과학기술 서적·지리서, 명대 말 청대 초의 문학과 예술·사상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것들은 조선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성리학과 대척적인 지점에 있는 것들이었다. 서학은 물론이요, 양명학과 양명좌파와 같은 주자학에 반하는 사유들, 양명학을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엄격한 자료적 증거를 동원하여 경전을 연구함으로써 성리학이 독점했던 경전 이해를 근저에서 해체했던 고증학이 그것이었다.

문학에서도 과거의 문학적 전범을 복제함으로써 전범의 예술적 성취를 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배격하고 작가의 창조적 개성을 발휘하고, 상대적 시각으로 현재의 세계를 현재의 언어로 재현할 것을 주장하는 공안파의 비평이 18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수용된다. 여기에 사물과 인간에 대해 참신한 인식을 형상화한 소품문, 기성의 도덕을 넘어서 있는 인간 세계의 리얼리티를 그리는 소설(예컨대 『금병매』)들이 대대적으로 수입돼 유행처럼 번졌다. 명·청대의 서화와 비탁(碑拓, 비석 탁본)이 수입돼 조선의 그림과 글씨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김정희의 추사체는 그 영향의 최고의 생산적 성과다), 이런 서화와 골동품을 본격적으로 수장(收藏)하는 컬렉터도 출현했다.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을 축적하는 장서가 역시 이 시기부터 출현한 것이다.
베이징에서 수입된 다양한 사유들이 18세기 문화적 다양성을 산출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연암과 이덕무, 이옥의 문학은 공안파와 김성탄의 소설비평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산의 경학은 청의 경학(특히 고증학)의 영향을 받았다. 서유구의 거작 『임원경제지』는 베이징에서 수입한 책을 편집한 것이었고, 유금의 유클리드 기하학은 바로 이 시기 수입된 서양 수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서학이 천주교가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18세기 후반 갑자기 출현한 문화적 다양성과 독창성은 곧 국제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문화적 수용과 창조의 주세력은 누대(累代)에 걸쳐 서울에 살면서 권력의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 축들, 곧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다. 물론 권력이나 돈은 없지만, 경화세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축들도 이 속에 포함될 것이다.

문화의 옹호자이자 억압자였던 正祖

문제는 이런 문화적 독창성과 다양성이 19세기가 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정조가 있다. 정조는 한편으로는 문화의 옹호자이면서도 한편으론 억압자였다. 정조는 베이징에서 수입되는 문화와 학문·예술에 첨예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규장각을 세우고 경사강의를 여는 등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으나, 한편 민간의 다양한 문화가 결국 그의 왕국을 지지하고 있는 성리학과 대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가 일으킨 문체반정은 그 새로운 사유들을 압살하는 바로 보수반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조가 죽자 보수세력은 신유사옥을 일으켜 18세기 후반의 독창적이고, 다양했던 사유를 압살한다. 하지만 그 단초는 이미 정조 때 마련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 19세기 들면서 정치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세도정치의 출현도 문화 퇴조의 이유로 꼽아야 할 것이다.

18세기 후반 문화의 독창성과 다양성은 주로 조선의 외부, 베이징과의 교섭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었다. 교섭의 대상은 중국의 베이징이란 좁은 지역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문화에는 생기가 돌았다. 닫힌 마음과 자세로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현재 세계를 좁다 하고 누비는 한국이 과연 어떤 다양하고 독창적 문화를 창조할 것인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명관씨는 참신한 시각과 꼼꼼한 고증을 통해 우리 고전을 현대 독자들에게 맛깔스럽게 전달하는 한학자로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 저서를 다수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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