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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이겨내는 기계의 아름다움

중앙선데이 2007.09.08 19:18 26호 31면 지면보기
386세대 이전의 사람들이라면 공통된 기억이 하나 있다. 학기 초 가정환경조사 설문지를 적어내던 일이다. 당시 궁상스러운 살림에 내세울 만한 변변한 물건이 몇 개나 있으랴.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있다면 부잣집 자식 소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재봉틀 정도를 가진 집이 대부분이었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싱거 51W51 미싱’

우리 집 또한 내세울 만한 물건이라곤 재봉틀뿐. 누가 볼세라 부끄러워 손을 가리고 적어낸 재봉틀은 촌스러운 이름 대신 싱거(singer) 미싱으로 바꾸었다. 싱거 미싱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직접 옷을 지어 가족에게 입힐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초상과 시대의 궁벽함은 어느새 까맣게 잊혀져갔다.

싱거 미싱, 미국의 ‘아이작 싱거’가 처음 특허를 내 만든 재봉기를 부르는 이름이다. 126년이 지난 지금까지 싱거의 명성은 퇴색되지 않았다. 여전히 전세계 사람들은 싱거 미싱으로 만든 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며 살고 있다. 재봉기를 실용화한 싱거의 업적은 인류의 생활사를 바꾸어 놓았다 해도 좋다. 우리나라 또한 싱거 미싱의 큰 수혜자다. 이만큼 살게 된 바탕엔 1960, 70년대 싱거 미싱의 역할이 매우 컸으니까.
K의 회사 전시장에 진열된 싱거 미싱을 보았다. 1953년에 제작된 ‘51W51’이란 가죽 박음질용 미싱은 50년 역사의 중견기업과 함께하는 상징으로 우뚝했다. 마치 준마를 연상시키는 주철제의 날렵한 검은 몸체, 굳건하고 마디게 보이는 플라이 휠, 신전의 기둥 같은 사각 베이스. 싱거 미싱은 차라리 미술품에 가까웠다. 기계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구두를 만들 때 사용한 ‘51W51’은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일 뿐이다. 구두를 넣고 박음질하기 위해 불거진 밑판의 받침대와 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베이스, 강도를 확보하기 위한 견고한 재질의 질감…. 모든 요소는 기능의 극점을 추구하기 위한 선택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완결한 인간의 조형감각은 예사롭지 않았다.

기능만을 생각하는 설계자와 외형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는 항상 대립하게 마련이다. 조화와 균형의 관점에서 마무리시킨 이 산업용 기계는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움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하다. 어느 곳 하나 부실함이 없고 넉넉한 여유로 넘치는 느낌이다. 싱거 미싱의 기계미는 강렬한 힘으로 발산된다. 아름다움은 곧 에너지였다.

세월을 이겨내고 남은 낡은 미싱 한 대는 이제 예술품으로 격상되었다. 이를 직접 사용했던 공장장은 싱거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었다. 눈맛과 손맛을 확인하며 함께한 20년의 애정은 폐기 처분될 뻔했던 고물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진정 좋은 물건엔 시간을 극복하는 힘이 있다. 그 실체는 사용가치를 웃도는 아우라(AURA)일 것이다. 아우라는 시대의 역량과 인간의 예지를 통해 덧붙여진다. 얼치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범접하지 못할 경지를 확인하는 일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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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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