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下) 서울서 헤이그까지 여정 재구성

중앙일보 2007.06.28 04:59 종합 14면 지면보기

그래픽 크게보기




한국사를 빛낸 위인 가운데 이준 열사만큼 논란과 궁금증을 많이 남긴 인물도 드물다. 고종 황제와의 만남, 신임장을 받게 된 경위, 헤이그 호텔에서의 사인 등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따라서 이준 열사를 둘러싼 많은 오해와 역사의 왜곡이 있어왔다. 이준 열사 순국, 헤이그 특사 100주년을 맞아 본지는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토대로 당시의 긴박했던 장면을 재구성했다.

◆ 멀고 먼 헤이그, 64일간의 여정=1907년 4월 22일. 이준 열사는 부인 이일정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 안현(안국동) 자택을 나섰다. 헤이그까지 64일간에 걸친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 날이다. 허리춤 깊숙이에는 고종의 신임장을 간직한 채였다. 이에 앞서 한 달 전인 3월 24일 밤. 평리원 검사 이준은 극비리에 궁에 입궐했다. 고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밀담을 나눈 이준은 결연한 표정으로 어전을 물러나왔다. 당시 그는 시 한 수를 읊었다. "헤이그 밀사가 한번 간 후에 어느 누가 술잔 놓고 청산에서 울어주리(海牙密使一去後 誰何盃酒靑山哭)." 이미 헤이그 특사의 길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당시 서울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을 규탄하는 국권회복 운동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 황제의 신임장=누가 고종의 신임장을 대궐 밖으로 가지고 나왔는지가 관심거리다. 당시 궁궐은 일본군이 출입자들을 일일이 몸수색할 정도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일본은 호시탐탐 고종을 폐위시킬 빌미를 찾고 있던 때다. 따라서 고종이 신임장을 써준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궁궐 출입 시 몸수색이 어려운 여성이나 외국인이 신임장을 받아 이준에게 전달한 것으로 학계에선 추정한다. 당시 기독교도인 이준이 출석하던 교회와 인척관계에 있는 상궁과 고종의 신임을 받던 학부 고문 헐버트가 신임장을 건네준 유력한 인사로 꼽힌다. 일부에선 아예 고종의 신임장이 위조문서라는 성급한 주장을 펴고 있지만 워낙 극비리에 이뤄진 일이라 정확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이준의 순국,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흔히 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장에서 장렬하게 할복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학자 유자후가 1947년에 펴낸 '이준 선생전'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시 역사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 인용돼 왔다. 그러나 학계는 이 열사 순국 장면을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가 장인인 이준 열사의 행적을 미화하려 사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이다.

송창주 이준 열사 기념관장은 "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장이 아닌 당시 숙소였던 드종 호텔에서 순국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헤이그 시청 문서실에서 최근 기자가 찾아낸 이준 사망증명서 원본에는 "법관이었고 대한제국에 거주하는 이준은 7월 14일 저녁 7시 헤이그에서 사망했다. 나이는 49세. 함경도 북청에서 출생했고 결혼했으며 기타 아는 바 없다"고 적혀 있다. 사인에 관한 언급은 없다. 이준 열사의 최후를 지켜본 사람은 없었다. 이상설.이위종 대표가 호텔을 비운 사이 열사는 홀로 숨졌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검증되지 않은 병사설.독살설.단식자살설 등 각종 추측만이 떠돌고 있다. 최근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뜻의 '분사(憤死)'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주로 쓴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선 일본의 독살이나 자결 가능성을 크게 본다. 이 열사가 사망 전까지 건강했고, 갑작스레 별세했기 때문이다. 현지의 한 백과사전은 '회의 참석을 못하자 자결했다'로 기록했고, 이 열사가 묻혀 있던 묘지의 100주년 기념 책자에는 "종기설◆ 자살설◆ 혹은 …◆ "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일제는 이 열사의 순국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뺨에 난 종기로 인한 단독설.병사설.심장마비설을 널리 퍼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서지학자인 이양재씨는 "이준 열사는 7월 10일께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금식하는 가운데 분노의 기운이 극도에 달하면 인체의 기가 머리로 올라가 사생결단만 생각하게 된다. 이때 복부에 칼이 약하게 들어가도 폭발적인 현상이 일어나 즉사하게 된다"고 자결설을 주장했다.

헤이그=유권하 기자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 검사'

한국 최초의 검사, 이준(1859~1907)을 아십니까. 고종 황제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됐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가 검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검찰청은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7월 14일)을 맞아 '검사 이준'의 삶을 기리는 작업을 추진한다. 이준 검사의 흉상을 청동으로 제작하고, 그의 검사 임명장을 복원해 대검찰청에 전시할 계획이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갑오개혁(1894년) 이듬해 설치된 법관양성소의 1회 졸업생이다. 구한말 조정이 육성한 최초의 근대 법관인 것이다. 이준 검사는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 시보로 법률가의 삶을 시작했다.

첫 번째 검사 시보 생활은 한 달 만에 끝난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 때 일본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에서 2년여간 법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1906년 대한제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평리원 검사로 재임용됐다. 이준 열사는 1907년 고종황제가 내린 은사령(사면) 사건으로 검사로서의 기개를 펼치게 된다. 은사안 작성을 맡은 이준은 당시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복역 중이던 나인영.오기호를 사면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직속 상관인 김모 형사국장은 이들의 이름을 빼고 다른 중죄인을 명단에 넣었다. 그는 시정을 요청했다가 거절되자 형사국장을 고소했다. 항명을 한 셈인 이준 열사는 구속돼 법정에 서게 된다.이 사건으로 고종에게 '강직한 검사'로 각인된 이준 열사는 이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김승현 기자

북한도 애국지사로 … 생가 개축'
신상옥 감독 납북 뒤 영화화


헤이그 시청 문서실 사서가 이준 열사 사망증명서 원본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헤이그=유권하 기자]
영화광인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1978년 납북된 고 신상옥 감독(2006년 사망)이 84년 북한에서 처음 제작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이준 열사의 삶과 조국애를 다룬 작품이다. 신 감독은 영화 끝 장면에 만국평화회의에서 미국 대표들의 반대로 이준 열사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을 부각했고, 김정일은 여기에 큰 만족을 표시했다는 게 신 감독의 귀환 이후 증언이다.

김정일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감행한 신상옥.최은희씨 납치사건의 첫 결과물이 이준 열사의 생애를 다룬 영화였다는 사실은 이 열사가 북한에서도 애국지사로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준 열사는 북한과 인연이 많다. 생가가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 용전리는 북한에 건설하려던 경수로 핵 발전소 부지와 가깝다. 2002년 8월 경수로 현장을 방문한 기자가 돌아본 그의 생가는 말끔하게 페인트 칠을 해 관리되고 있었다. 당시 북한 측 안내원은 "장군님(김정일)께서 6월에 북청 지역을 현지 지도하셨기 때문에 인민들이 깨끗하게 단장을 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관영매체들도 당시 김정일은 맛 좋은 북청 사과의 산지로 알려진 용전리에 들렀던 것으로 보도했다.

북한은 애초 초가집이던 이곳을 기와집으로 개축했다. 또 이준 열사의 증손자가 살며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준 열사가 소지했다는 '외교여권'과 헤이그에 있는 고인의 묘비 사진도 전시돼 있다. 주요 유품은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은 북한 정권 수립과 함께 초대 도시경영상(장관)을 지냈다. 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그 뒤 이용은 사법상(법무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54년 8월 사망했다. 이용의 무덤은 현재 평양시 외곽 신미동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김일성 정권의 기틀을 닦는 데 기여했다는 이들을 안장한 곳으로, 북한 성지 중 하나다.

북한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49년 사망)이 해방 전 이용을 만난 사연을 전하며 이준 열사와 김일성 가계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이영종 기자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