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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도끼 만행 항의문 보내자 김일성이 '유감' 답신"

중앙일보 2007.06.24 20:56 종합 29면 지면보기
만난 사람 = 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


6·25 57주년 … 군사정전위 '통역 41년' 홍흥기씨

 
판문점에서 41년 동안 통역을 담당하다 은퇴한 홍흥기씨가 전쟁기념관 광장에서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김상선 기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17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했다. 전투기를 포함한 197대의 비행기는 제공권을 장악했다.



 당시 한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다. 비행기는 연락용과 연습용을 합해 22대에 불과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 직전인 5월 10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북한군이 병력을 38선으로 이동하고 있고, 침략 위험이 임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 장관은 국회에 부족한 병력과 장비를 보완하기 위한 ‘긴급건의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는 5·30 선거로 휴회 중이어서 최소한의 긴급 수혈도 받지 못한 채 전쟁을 맞은 것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6·25 전쟁은 52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포성을 멈췄다.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인 미국·중국·북한은 정전 상태를 관리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를 구성했다.



 그런 군정위의 산증인으로 41년간 북한군과의 협상에서 통역을 맡았던 홍흥기(74)씨가 지난달 30일 유엔군사령부를 떠났다. 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76년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일촉즉발의 사건 뒤에 열린 군정위 회의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홍씨는 60년부터 주한 미8군에서 도서관 업무를 맡다 66년 군정위 통역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군정위의 역할은 무엇인가.



 “북한이 일방적으로 군정위를 탈퇴했음에도 유엔사는 정전협정 관리를 위해 군정위를 유지하고 있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될 때까지 군정위는 한반도 휴전 관리 주체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정전협정 60항에는 ‘쌍방이 고위급 정치회담을 개최해 평화협정을 맺고 정전협정을 폐기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이 조항이 이행되면 군정위는 자동 폐기된다.”



 -군정위가 쉴 새 없이 가동되던 60∼70년대와 지금의 북한 태도가 바뀌었나.



 “정말 많이 바뀌었다. 60∼70년대에는 울진ㆍ삼척 및 124군 부대 무장간첩 사건 등 남한 침투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요즘에는 무장간첩 남파사건이 없어지지 않았나.”



 -북한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하나.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60∼70년대에 비해 다소 완화되는 등 외형상으론 변화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 생각으로 적화통일을 기본으로 하는 북한의 대남전략은 본질적 측면에선 전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92년 군사정전위에 참가한 유엔군 측 대표단. [사진=중앙포토]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에서 위기가 가장 고조됐을 때는 언제인가.



 “68년 1월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과 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로 기억하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북한에 11개월 동안 억류돼 있다 그해 12월 23일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송환됐다.”



 -통역을 하면서 북한군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허위 날조’다. 이 말을 수천 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북한은 단 한 건도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한 적이 없다. 심지어 124군 부대 청와대 습격 사건 때도 남측의 날조라고 주장했다. 60년대 후반 회담 때 북측이 ‘남쪽에서 무장침투를 했다’며 카빈 소총을 증거물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총의 일련번호를 조사한 결과 2년 전에 북한군 무장간첩이 한국군을 습격해 탈취해 간 총으로 밝혀졌다. 그 정도로 생떼를 썼다.”



 -통역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남북 간 문화ㆍ언어의 이질화 때문에 북한 측 대표들이 쓰는 고사성어나 순우리말을 못 알아듣고 당황할 때가 있었다. 영어 통역보다 한글 통역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



 -군정위 회담이 열렸을 당시 북측이 회담에 성실하게 임했나.



 “북측은 회담을 선전장으로만 활용했다. 미리 작성해 온 발언문을 그대로 읽고 끝낸다. 그러다 보니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즉석 발언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엔사와 남측을 비난하는 것 외에는 즉석 발언이 없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분리 근무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도끼 만행 사건 이후다. 그 전까진 직경이 800m인 JSA 내에선 북한군과 유엔군이 함께 근무했다. 도끼 만행 사건 이후 유엔군사령관이 항의통지문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그러자 김일성이 ‘유감’이라는 표현을 쓴 답신을 보내 왔다. 그런 뒤 군사분계선을 그어 양측의 경비병들을 분리시키자는 방안이 군정위 회의에서 합의됐다.”



 -도끼 만행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나.



 “사건이 일어난 직후 투입됐다. 당시 미군 희생자 중 한 명인 버렛 중위가 실종됐었다. 즉시 패스트포스가 꾸려져 버렛 중위를 찾아나섰고 나도 함께 움직였다. 수색대가 곧 버렛 중위를 찾았지만 위독한 상태였고 후송 중 사망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장교였고, 버렛은 소대장이었다. 판문점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북한군으로부터 도끼에 맞아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기억에 남는 북한군 대표가 있나.



 “70년대 북측은 ‘남한에는 거지들뿐이고 온통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선전전을 거듭했다. 그러자 유엔군 측은 회담에서 북측 주장의 허구성을 알리기 위해 비디오를 상영했다. 서울의 백화점과 차량 등 남한의 생활 수준을 담은 영상을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를 배경음악으로 상영했었다. 그랬더니 북측 대표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 등을 하며 ‘당장 집어치우라’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거의 유일하게 아무 말 없이 영상물을 지켜보던 북측 수석대표는 다음 회의부터 불참했다. 참 점잖은 분이었다.”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간의 교전(交戰) 도 있었나.



 “대표적 교전이 84년 소련인 피신 사건 때 일어났다. 당시 북한군이 남측으로 피신하는 소련인을 쫓아 총을 쏘면서 내려왔다. 유엔군과 교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남측 지역인 ‘자유의 집’ 앞마당에서 북한군 세 명이 죽었다. 그러자 북측이 직통전화로 ‘사격을 중지하자’고 요청해 총격전이 끝났다.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을 하던 이수근씨가 월남할 때도 총격사건이 있었다. 과거 판문점에선 항상 위기감이 감돌았다.”



 -군정위 회담을 할 때 애로사항은.



 “70년대 중반 없어지긴 했으나 웃지 못할 상황이 자주 일어났다. 군정위 대표단은 회담이 7∼8시간을 끌어도 화장실을 못 갔다. 군정위 규정 때문이었다. 가장 길게는 11시간도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군정위 회의는 3개국어로 한다. 유엔사 측은 영어ㆍ한국어ㆍ중국어 순으로, 북한은 한국어ㆍ영어ㆍ중국어 순으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회담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회담 참가자들은 전날부터 물을 먹지 않는다. 식사도 안 한다. 그래서 회담이 끝나면 엉금엉금 기다시피 나온다. 70년대 중반 이런 상황을 지켜본 유엔사 측 대표가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하냐’며 개선안을 북측에 제안했다. 세 시간 회의 뒤 20분간 휴회를 한 뒤 속개하는 안이었다. 자존심 싸움 때문에 망설이던 북측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과거 판문점에서 군정위 회담이 진행될 때 밖에서 볼 수 있었나.



 “판문점 관람객들이 창문을 통해 회담장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고, 취재기자도 있었다. 70년대 중반 때인가 이런 일이 있었다. 북한군 통역장교 중에 연세대 출신이 있었다. 취재기자가 회담장을 들여다보니 연세대 동문이 통역장교로 앉아 있어 면회신청을 했었다. 처음엔 만나주지 않다가 한참 뒤에 만났다고 하더라. 그러나 만난 게 알려진 뒤 그 통역장교는 회담에서 배제됐다.”



 -고향이 강원도 금강산 인근인데 금강산 개방 이후 가 본 적이 있나.



 “못 가 봤다. 집사람이 ‘북한 사람들에게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어 억류될지 모른다’며 반대해서다.”



 -바람이 있다면.



 “유엔사의 기본 방향은 남북 대화를 증진시키는 데 있다. 남북 대화가 보다 활성화돼 죽기 전에 통일을 봤으면 좋겠다.”



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





군사정전위는



 군사정전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는 정전협정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협정 이행을 감독하며 위반 사건을 협의 처리하는 공동기구다. 남ㆍ북과 유엔사, 중국군이 참여했다.



 군정위는 각각 5명씩 10명으로 구성됐었다. 미군 소장ㆍ한국군 소장ㆍ한국군 준장ㆍ영국군 준장, 유엔 참전국 중 1개국 대령이 유엔사 측의 위원이었다. 북 측에선 중장(한국군 소장), 소장(한국군 준장), 중국군 장군, 북한군 영관급 장교 2명이 참석했었다.

  북한은 1991년 3월 군정위 유엔사 측 수석위원을 미군 장성에서 한국군 장성(황원탁 소장)으로 교체하자 군정위 불참을 선언했다. 1994년 4월 28일에는 군정위 북측 대표단을 판문점에서 철수시켰다. 대신 다음달 인민군 총정치국의 지휘를 받는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다.



 유엔사와 북한은 1998년 군정위 대체기구로 ‘유엔사와 북한군 간의 장성급회담’을 개최했다. 하지만 유엔사-북한군 장성급회담은 2002년 14차 회담에서 동해ㆍ경의선 철도 연결을 위한 비무장지대 일부 구간 개방 문제를 논의한 뒤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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