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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촉에서 사각거리는 피렌체의 매혹

중앙선데이 2007.06.24 00:11 15호 31면 지면보기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도시 1순위에 오른다는 이탈리아 피렌체. 쫓기듯 스치는 관광객의 눈으로는 건물의 외형만 보고 오기 십상이다. 이 도시에선 적어도 일주일 이상 머물러야 한다. 오래된 도시의 전통이 주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비스콘티’ 만년필

피렌체에 널려 있는 수많은 유적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도시의 자부심을 통해 현재를 이야기한다. 핵심은 전통을 살아 숨쉬게 하고 재창조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비스콘티(VISCONTI)’ 만년필에서 도시의 저력을 보았다면 과장일까.

‘비스콘티’, 필기구 수집가인 단테 베키오와 루이지 폴리가 디지털 시대에 설립한 신생 만년필 제조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필기구를 제 손으로 만들겠다는 피렌체인의 각오는 현실이 되었다. 필기구 수집가가 세운 만년필 회사, 뭔가 다르지 않다면 존재 이유는 없다.

‘비스콘티’엔 기존 만년필 명품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색채가 담겨 있다. 엄숙과 권위 대신 자유와 창의의 에너지가 넘친다. 몸체는 아름다운 색채의 실현을 위해 필름의 재료로 쓰이던 셀룰로이드를 선택했다.

색상의 느낌과 깊이를 잘 표현하고 내구성 측면에서 유리한 소재라는 게 이유다. 여기에 전통의 피렌체 장인들이 기예를 더해 수공으로 펜촉을 만든다. 외형의 수려함과 필기의 감촉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니 차별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피렌체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신비한 색감과 재질의 독특함, 르네상스 시대의 풍요를 담은 듯한 절묘한 선의 포름(forme). 단순한 만년필에서 읽혀지는 상징은 피렌체와 ‘비스콘티’를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한다. 비스콘티는 곧 피렌체이자 피렌체 사람의 풍요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멋진 자태의 만년필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감성의 건조함 탓일 게다.

견물생심이다. 녹황색의 ‘비스콘티’를 샀다. 엄청난 가격대의 더 좋은 만년필이 즐비하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따 만들었다는 ‘고흐 시리즈’다. 불우했던 천재 화가의 불안한 열정과 광기의 에너지를 닮고 싶은 마음이다.

마블과 같은 만년필 표면의 색채에서 고흐 후기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렸던 파리 북쪽의 오베르 주변 풍광을 떠올렸다. 에보니ㆍ녹색ㆍ붉은색ㆍ청색ㆍ흑색… 어떤 것을 집어들어도 휘몰아치는 고흐의 강렬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든 ‘비스콘티’의 매혹적 색채는 고흐의 그림처럼 단 하나뿐이다. 아름다움은 시간을 초월해 화가의 열정을 되살렸다.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토크쇼에 ‘비스콘티’ 고흐 만년필을 들고 나와 자랑하는 장면을 보았다. 세계의 명사들이 좋은 물건을 스쳐 지나갈 리 없다. 나같이 게으른 예술가 또한 위대한 천재의 에너지를 조금 훔쳤다 해서 흉이 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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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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