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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밀실 정치사 … 한정식집 '장원'의 추억

중앙일보 2007.05.15 05:18 종합 6면 지면보기



"군인끼리 다 해먹나" 말에 격분
노태우, 돌리던 술잔 집어 던져

1993년 3월. 취임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이 한정식집 '향원(장원의 후신)' 사장인 주정순(12일 작고)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부의 대국민 고통 분담 호소에 동참하기 위해 음식값을 내렸다면서요. 고맙습니다. 꼭 한번 찾아가지요."



YS는 약속대로 그해 6월 하순 청와대 간부들과 향원을 찾았다. YS는 60년대 초반부터 장원의 단골이었다.



YS만이 아니다.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정일권 전 국무총리 등 정.관계 인사들과 이병철.정주영.최종현 전 회장 등 재계 거물들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당시엔 국회의사당이 태평로(현재의 서울시 의회)에 있었고, 정부종합청사에는 장관들이 몰려 있어 청진동에 위치한 장원을 찾기가 쉬웠다.



1970년대에 ‘요정(料亭) 정치’라는 말을 낳게 했던 고급 한정식집의 원조 격인 ‘장원’의 간판과 대문. 58년 서울 종로구청 앞(청진동)에서 개업해 지금은 필운동으로 옮겼다. 김상선 기자
그러나 장원이 유명해진 건 정치인들의 모임이 자주 열렸기 때문이다. 58년 종로구청 앞에서 시작한 장원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치 이면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주로 청와대 경호실이 관리하는 '안가(안전가옥의 준말)'를 이용했지만 여야 의원들과 고위 관료들은 요정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숱한 정치협상이 이뤄졌고, 계보 모임이 열렸다. 60년대 중 후반 민중당.신민당 원내총무를 지낸 YS 등 야당 정치인들은 외상으로 밥을 먹고는 설날이나 추석 등 자금 사정이 풀리는 명절 무렵에 한꺼번에 목돈을 주는 방법으로 계산을 했다. 주씨는 이처럼 '외상밥 주는'방식으로 야당을 지원한 셈이다.



이와 함께 "종합청사의 장관들이 거의 매일 장원에 가서 밥을 먹는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공무원들은 점심 때 요정 가서 밥 먹지 말라'고 구두 지시를 내린 일도 있다"고 70년대 중반 국무총리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신경식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소개했다.



장원의 곳곳엔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이 묻혀 있다. 다음은 10~13대 의원을 지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회고록 '문주 40년'에 소개된 얘기.



87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장원에서 각 시도 지부장 회식을 열었다. 노 대표는 지부장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때 부산지부장이던 곽정출 의원이 "왜 군인끼리 다 해먹느냐"고 했다. 격분한 노 대표는 돌리던 작은 잔을 곽 의원에게 집어던졌고 잔은 당시 전북지부장이던 고건씨의 옆을 스쳤다.



장원은 음식 맛으로도 유명했다. 남 전 장관은 "돌김과 토하젓을 비롯한 젓갈은 일품이었다"고 기억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쑥 넣은 된장찌개를 좋아했고 이병철 전 삼성회장은 과식하지 않았으나 팁은 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삭힌 홍어에 묵은 김치와 삼겹살을 곁들여 먹는 삼합을 즐겼다고 한다.



장원은 '한정식집의 사관학교'로 통한다. 주씨가 '엠피(MP.헌병)'란 별명을 가졌던 건 종업원들의 입단속과 품행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주씨는 종업원들에게 "단정하게 열심히 일하면 내가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새로 살림을 차려 나간 한정식집이 '두마' '미당' '늘만나' '목련' 등 10여 군데에 이른다. 이 중 서대문에 자리 잡은 '수정'은 DJ와 동교동계가 즐겨 찾았다.



주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권사)였다. 장원에서 웨이터로 일한 사람 중 두 명이나 목사가 됐을 정도로 종업원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인심도 후했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나라당 이성헌 전 의원은 "나를 보면 '고생이 얼마나 많으냐, 관상이 좋다'며 밥값을 받지 않으셨다"며 "나중엔 양복도 한 벌 선물해 주셨다"고 말했다. 남재희 전 장관은 "주씨는 예술가들과의 교류도 잦았다"며 "장원의 방에 걸린 그림 중엔 남농 허건과 의제 허백련의 그림도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주씨의 빈소엔 YS.DJ.JP(김종필 전 총리)까지 3김이 모두 조화를 보냈다. 황인성. 이수성 전 총리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 전 총리는 "주씨의 인품이 워낙 훌륭했기에 직접 문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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