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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Movie TV] 사랑도 베는 칼의 노래

중앙일보 2003.11.27 16:47 주말섹션 18면 지면보기
지난 25일 밤 서울 시내의 한 극장에서는 배우 신영균, 이장호 감독, 이두용 감독 등 20여명의 영화계 원로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28일 개봉하는 영화 '천년호(千年湖)'의 VIP 시사회가 열렸던 것이다. '천년호'는 신라시대 진성여왕이 통치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멜로와 무협 팬터지를 결합한 사극이다. '두사부일체''가문의 영광'으로 몸값을 부쩍 키운 정준호, 이동통신 CF로 일약 신세대 스타로 떠오른 김효진, TV 사극에서 자주 얼굴을 선보였던 김혜리가 주연을 맡았다. 사실적인 검술 장면과 화려한 세트, 허공을 가르는 와이어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특수 효과 등 볼거리에 많은 품을 들였다.


신상옥 작품 리메이크 영화 '천년호'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는 신목(神木)을 섬기는 아우타족을 전멸시키고 신라를 세운다. 아우타족의 피는 커다란 호수를 이루고 박혁거세는 이 부족의 부활을 막기 위해 신목이 있던 자리에 신검(神劍)을 꽂아 봉인한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 신라 진성여왕 시대. 갈수록 빈발하고 거세지는 변방의 전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놓이지만 충성스러운 장군 비하랑(정준호)의 활약으로 힘겹게 조정을 지켜낸다. 비하랑은 검술 연습 도중 독사에 물려 신음할 때 목숨을 구해준 처녀 자운비(김효진)와 사랑에 빠진다. 평소 비하랑을 흠모하던 진성여왕(김혜리)은 이를 알고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어느 날 자운비는 비하랑의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쫓기다 천년호에 몸을 던진다. 그러자 봉인이 풀린 아우타의 원혼이 자운비의 몸을 빌려 요귀로 환생해 신라에 복수를 꾀한다. 이제 비하랑은 사랑하는 여인의 몸에 칼을 꽂아 천년사직을 구해야 할 처지에 빠진다.



이날 원로 영화인들이 '천년호'시사회장을 찾은 것은 이 영화가 신상옥(사진) 감독의 1969년작 '천년호(千年狐)'를 리메이크했기 때문이다. 69년작 '천년호'에서 신영균씨는 주연을 맡았고 이장호 감독은 조감독이었다.



신 감독의 '천년호'는 제작 이듬해인 70년 스페인의 산체스 팬태스틱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을 만큼 동양적인 팬터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69년작 '천년호'와 2003년 이광훈 감독의 '천년호(千年湖)'는 제목의 마지막 한 글자가 각각 여우(狐)와 호수(湖)인 데서 알 수 있듯 다소 차이가 있다. 원작 '천년호'에서는 아우타족이 아니라 세상을 어지럽히던 천년 묵은 요물인 여우를 봉인하며, 봉인 방식도 신검이 아니라 신궁(神弓)을 사용한다. 이 여우는 이후 원한에 쌓여 죽게 된 한 인간의 몸을 빌려 부활하게 된다.



두 작품 모두 시대적인 배경은 신라 진성여왕 시절이다. 하지만 진성여왕을 바라보는 관점은 차이가 크다. 69년작에서는 진성여왕을 음탕하고 부덕하며 애욕에 눈이 먼 인물로 그렸다. 이에 반해 이번 '천년호'에서는 비록 질투에 몸부림치긴 하지만 문예에 능하고 나라의 앞날과 민심 수습에도 애쓰는, 고뇌하는 인간으로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의 경우 신영균은 혼인을 한 장군 김원랑 역을 맡았으나 정준호는 화랑 출신으로 하층 계급의 처녀와 사랑에 빠진 미혼의 장군으로 탈바꿈했다.



이날 영화를 본 이장호 감독은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온 것 같다.가벼운 사랑이 넘치는 지금, 가슴 적시는 애절하고 슬픈 사랑이야기"라고 말했다. 신영균씨는 "팬터지 영화의 기술적인 진보에 감탄했으며 현대적인 인물로 재창조된 진성여왕의 캐릭터가 아주 흥미로웠다"고 평했다.



60억원의 순제작비가 들어간 '천년호'는 당시 모습을 살려내는 데 많이 고심했다. 신라의 궁성을 재현하기 위해 중국영화 '영웅'의 촬영지를 활용했고, 1천2백벌의 의상 하나하나에 철저히 고증을 거쳤다는 게 영화사의 설명이다.



리메이크 영화의 유리한 점은 관객이 익히 아는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제작자가 위험 부담을 덜 수 있고, 작품성이 검증된 원작에 새로운 해석과 재미를 덧붙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닥터 봉''자귀모'의 이광훈 감독은 발달한 영화 기술을 끌어와 원작보다 볼거리가 많은 '천년호'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멜로와 액션, 스펙터클 등 한꺼번에 다채로운 영화적 재미를 주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너무 산만해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2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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