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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과 함께 읽는 명사들의 시조 - 9월

중앙일보 2006.09.26 21:18 종합 21면 지면보기
인조 5년(1627). 후금은 조선을 침략해 '형제의 의(義)'를 맺는다. 역사가 기록하는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맹약을 깨고 황금과 식량, 정병(精兵)과 병선(兵船)을 요청하는가 하면 압록강 변경의 민가를 마구 약탈한다. 이도 모자랐는지 후금은 '군신의 의(義)'를 요구한다. 급기야 조선에선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론(斥和排金論)'이 힘을 얻어 선전포고의 기운마저 일어난다.


볼모 가는 세자 통한의 설움이여
아비 된 국왕 애끓는 심정이여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금은 선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낸다. 조선이 이를 무시하자, 격노한 청 태종은 그해 12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다.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피한다. 그러나 청의 선봉부대는 침략 보름 만에 인조를 에워싼다. 이듬해 1월, 나라 안 군사들이 구원에 나섰으나 실패한다. 산성은 고립무원의 절망에 빠진다. 군사 1만3000과 양곡 1만4300석, 220개의 장(醬) 항아리로는 두 달을 버틸 수 없었다.



마침내 세자빈 강씨와 원손(元孫),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병화를 피해 들어간 강화도마저 함락된다. 인조와 세자의 호곡 소리가 남한산성을 가득 채운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는다. 조정은 환도하고, 청은 소현세자와 봉림, 척화론자 홍익한.윤집.오달제를 볼모로 철군한다.



'청석령 지나거냐~'는 봉림이 선양으로 끌려갈 때 지은 시조다. 청석령이나 초하구는 평북 의주 근방인데 엄동설한에 볼모로 잡혀가는 통한의 심정이 '궂은비'로 표현되고 있다. 참담한 심정을 님(인조) 계신 데 전할 이도 없는 막막한 현실이 가슴 아프다. 봉림은 1645년 소현세자가 변사하자 형을 대신해 세자에 책봉된다. 그리고 4년 후 왕위에 오른다. 효종이다.



'내라 그리거니~'는 봉림에게 화답한 인조의 시조다. '내가 이토록 그리운데 네가 그립지 않겠느냐. 머나먼 오랑캐 땅에 잡힌 몸이니 얼마나 그립겠느냐. 얇은 비단 창 밖에서 슬피 우는 저 접동새야, 돌아올 수 없다고 울지말아라. 내 마음 어찌할 줄 모르겠구나'.



8년간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낸 애타는 마음을 무슨 말로 이를 수 있을까. 인조와 효종의 시조에서 효심과 우애를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 저리게 생각하는 바 있으니, 바로'국력'이다. 왕은 나라다. 국가 원수가 다시는 고립무원의 경지에 빠져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다.



홍성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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