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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사회참여 실천한 '깨어 있는 어른'

중앙일보 2006.08.18 04:38 종합 10면 지면보기
강원용 목사는 근대화.민주화의 고비 고비에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를 냈던 우리 사회의 '깨어 있는 어른'이었다. 해방공간, 한국전쟁, 근대화와 민주화, 그리고 남북협력 시대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넘도록 역사의 중심에 서 활약하며 정치인.사회운동가.종교인으로 큰 자취를 남긴 거목(巨木)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좌가 아니면 우' '보수반동 아니면 진보개혁'의 이분법적 가치관이 판치던 세태를 거스르고 '제3의 길'을 모색한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강원용 목사 별세

1917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강 목사는 35년(당시 18세)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곳 은진중학교에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등과 학창시절을 보내며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당시 은진중학교 교사였던 김재준 목사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40년 일본 메이지학원 영문학부 졸업 뒤 간도.북만주.함남 회령 등지에서 교육사업과 농촌사업을 하던 고인은 45년 광복을 맞아 새로운 길을 걷는다. 김규식.여운형 등을 만나면서 청년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이 일생을 통한 현실참여의 시발이 됐다면 다른 하나는 경동교회를 설립해 성직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일이다. 고인은 평신도 자격으로 선린형제단을 결성하고 김재준 목사를 모셔와 45년 지금의 경동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48년 한국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49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86년까지 경동교회를 이끌며 장로교의 대표적인 교회로 키웠다.



그는 53년 유학길에 오른다. 캐나다 매니토바 신학부 대학원을 거쳐 56년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 교수를 만나면서 그의 신앙과 사유는 큰 변화를 경험한다. '기독교인이 사랑을 주장하면서 정의에 무관심한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감상주의에 불과하고 사랑이라는 관을 통하지 않으면 정의는 부정이 되고 만다'는 사상은 이후 사회활동에 뛰어든 그에게 이정표가 된다. 기독교 현실주의에 기초한 '중간, 그것을 넘어서'(Between and Beyond)라는 그의 철학은 강 목사가 '제3의 길'을 열어가는 바탕이 되었다.



60년대 초 귀국한 강 목사는 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설립한다. 군사독재가 낳은 사회 양극화 현상과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대화를 통한 화해뿐이라는 믿음에서다. 강 목사의 사회적 목표는'인간화'였으며 이를 위한 과정과 방법은 '대화운동'이었다.



65년 6대 종교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인 종교 간 대화모임을 시작으로,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의장을 맡아 종교인의 사회참여 및 평화운동,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에 앞장섰다. 이 공로로 니와노 평화상(2000년), 만해 평화상(2002년) 등을 받았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를 우선가치로 삼았던 강 목사는 해방 이후 줄곧 정치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70년대에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민주회복 국민회의' 대표위원을 맡았다. 이 때문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장준하 선생과 함께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받았다. 79년 3월 한명숙 간사(현 국무총리) 등이 연루된 이른바 '아카데미하우스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의 '이름'이 필요했던 군사독재 정부에 의해 81년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강 목사는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씨의 생명과 나의 명예를 맞바꾼 결단이었으므로 후회는 없다"고 술회했다.



또한 고인은 48년 이후 세계교회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에큐메니칼(교회일치) 운동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세상이지 기독교가 아니다'는 그의 신앙은 기성 교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터부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며 서양식 추수감사절을 고유의 추석으로 대체하고 예배에 탈춤공연을 넣는 등 그의 창의적인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윤리위원장.방송위원장.방송개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방송의 공정성과 자율성 확보를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2000년 이후에는 한반도 평화 정착에 여생을 바치기 위해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설립하고 초당적 협력과 국제연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인은 격동과 혼란의 시기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 치열하게 산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새 시대의 건설자' '폐허에의 호소' '믿는 나와 믿음 없는 나' '빈 들에서' '역사의 언덕에서' 등의 저서를 남겼고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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