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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을 위해 내 것을 줄 수 있나요?

중앙일보 2021.07.17 07:00
출처 : Morgan Marks. 'A Discussion on Equity and Equality'.(Powerhouse Montana)

출처 : Morgan Marks. 'A Discussion on Equity and Equality'.(Powerhouse Montana)

여기 세 개의 그림이 있다. 미국에서 평등과 공정의 차이를 설명할 때 등장한 그림인데 한국에도 SNS 등을 통해 꽤 많이 알려졌다. 특히 최근 20·30대 젊은 층 사이에서 ‘공정’이 큰 화두가 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언뜻 보면 어려울 게 없다. 첫 번째 ‘평등(EQUALITY)’ 은 모두에게 같은 상자를 같은 개수로 나눠줬다. 두 번째 ‘공정(EQUITY)’ 은 모두가 야구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키를 고려해, 없어도 되는 사람에겐 상자를 주지 않고,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 줬다. 세 번째 그림은 가진 자는 더 많이 누리고 부족한 자는 더 열악한 상황에 놓이는 ‘현실(REALITY)’을 꼬집었다.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그리 간단치가 않다. 모두에게 똑같이 상자를 제공한 게 그렇게 잘못됐나? 키가 다른 게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실제로 형편이 좀 낫다고 왜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줘야 하나, 큰 키 덕에 상자에 오르면 더 좋은 시야로 즐길 수 있는데 왜 그걸 희생해야 하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사람을 봤다.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가 만14~69세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4%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반면 자신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47.1%가 ‘공정하다’고 평가했다. 사진 국민권익위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가 만14~69세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4%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반면 자신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47.1%가 ‘공정하다’고 평가했다. 사진 국민권익위

젊은 세대가 원하는 공정은 뭘까. 그들은 씁쓸해할지언정 저마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걸 받아들인다. 집이 부유해 언어연수 기회가 많았거나, 키가 커서 농구에 유리하거나,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거나 등. 모두가 키가 제일 큰 사람과 똑같은 눈높이로 올라서야 한다는 ‘결과의 평등’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어쩌지 못하는 조건 때문에 아예 경기를 못 보는 건 억울하다. 그런 면에서 ‘(볼 수 있는)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건 두 번째 그림, 공정이다. 
 
그림을 보며 생각을 넓혀보자. 만약 구조가 다른(펜스가 없거나, 아주 낮거나) 야구 경기장이 여러 개 있다면? 야구 말고도 각자의 여건에 맞춰 즐길 수 있는 다른 스포츠들이 많다면?  
결국 다양한 선택지가 중요하다. 경제가 계속 성장해 좋은 일자리가 많이 늘어난다면 A기업에 취직하지 못해도 비슷한 조건의 B기업, C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 공정에 대한 불만이 상당 부분 누그러질 수 있다.  
 
지난 5월 서울 노원구 중계그린아파트 인근 상가 앞에서 경비원 부당해고를 규탄하기 위해 입주민들이 문화제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 독자제공

지난 5월 서울 노원구 중계그린아파트 인근 상가 앞에서 경비원 부당해고를 규탄하기 위해 입주민들이 문화제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 독자제공

직업의 귀천을 없애는 것도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한국 사회엔 여전히 직업에 따라 사람을 높고 낮게 여기는 인식이존재한다. 어떤 직업을 갖든 남들의 존중을 받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임금을 받는다면 과도한 경쟁으로 낭비되는 돈과 에너지를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데 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사회가 박수를 보내는 가치를 ‘권력’과 ‘돈’에서 다른 것으로 바꿔나가는 일이다. 봉사나 기부 같은 이타적인 행동,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 양보, 협동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제는 꽤 흔한 일이 됐지만, 구급차가 지나갈 때 운전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을 내어줄 때 느끼는 뿌듯함이 많은 돈이 주는 행복과 비슷해져야 한다.

 
이는 공정 사회와도 관련이 있다. 두 번째 그림에서 키 큰 사람은 상자가 없는데도 손을 들어 응원하며 즐거워하는 것 같다. 법에 따라 상자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받은 상자를키 작은 이에게 줬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함께 경기를 본다는 사실에 흡족해한다. 공정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지원)에 반드시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강제로 밀어붙이고 강요하는 제도는 효과를 내기 어렵고 새로운 갈등을 낳는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왼쪽)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왼쪽)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불어넣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합의를 끌어내는 건 결국 정치의 몫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어떤 사안이 내 책상까지 올라왔다면 그건 정말 어려운 문제라는 얘기다. 쉬운 문제였다면 누군가 이미 결정을 내리고 해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이 그런 문제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선 ‘공정이슈’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할 게 분명하다. 이 과정에 순간의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진지한 고찰로 공정 사회로 가는 로드맵을 짜고 실천해 나갈 정치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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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아 이소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