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존중받는 세상서 살고 싶다”유령처럼 사는 아이들

중앙일보 2021.07.05 15:00

[더,오래] 조희경의 아동이 행복한 세상(3) 

보편적 출생신고 캠페인. [사진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

보편적 출생신고 캠페인. [사진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

 
‘아동인권’하면 생각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판사가 한 남자아이에게 누구를 고소하냐고 묻자 아이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제발 부모가 아이를 더 낳지 못하도록 막아주세요”라고 말한다.
 
이 영화 ‘가버나움(Capernaum)’의 주인공은 12살 ‘자인’이다. 자인은 자식의 나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 밑에서 노동과 빈곤 그리고 폭행 등 학대를 받으며 산다. 부모의 방치 속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던 자인은, 나이 많은 이웃 아저씨에게 팔려 간 11살 여동생이 임신으로 죽음에 이르자 남자를 살해하게 된다. 자인은 동생의 죽음과 자신의 범죄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며 이들을 고소한다.
 
자인은 12살이지만 법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여러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방치했기에 사망한 여동생은 죽음조차 기록되지 못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영화 속 ‘자인’이 우리나라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의외로 정말 많은 가정의 아동들이 출생기록이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 되고, 가정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방치된 채 살아가고 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은 나이와 신분을 확인할 수 없어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예방접종, 건강기록 같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취업과 결혼 등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미등록 아동은 가정에서 방치되거나 가족과 분리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교육, 의료 및 사회보장 등 모든 사회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기가 태어나면 한 달 이내에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도록 정하고 있고, 부모가 출생신고를 안 하거나 자녀의 복리가 위태롭다면 검사나 지자체장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가족관계등록법 제46조). 그러나 지난 2년간 지자체장이 출생신고를 한 경우는 단 한건도 없다. 이런 이유로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모든 아동의 출생을 신고하도록 한국 정부가 조처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에 지난 4월 30일, 유니세프한국위원회가 참여하고 있는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는 출생통보제 도입을 촉구하는 간담회를 가졌다(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는 2015년부터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의 출생신고를 위해 함께 활동하는 기관들의 연대 모임이다).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가 전국 251개 아동복지시설을 대상으로 실시한 ‘출생미신고 아동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에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이 2년간(2019~2020년) 무려 146명에 이르렀다.
 
이 중 70.5%(103명)는 생후 6개월 이하의 갓 난 아기라서 이들의 평균 나이는 겨우 0.77세였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이유도 다양했다.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기가 75.3%(110명)로 가장 많았고, 혼인 외 관계, 미혼부/미혼모에게서 출생한 경우가 15.8%, 이주아동, 병원 외 출생 등으로 인한 미신고가 8.9%였다. 유기된 아기 대부분은 부모의 인적사항이 없고 출생일조차 알 수 없어서 출생신고를 하는데 오랜 기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다행히 현재까지 80.8%(118명)의 아동은 시설들에 의해 출생신고가 완료되었고 11%(16명)은 등록이 진행 중이지만, 8.2%(12명)는 여전히 출생신고가 안 된 상황이다.
 
지난 4월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 열린 '출생통보제 도입촉구'를 위한 간담회에서 여가부, 법무부, 행정부, 보건복지부가 법안 추진상황에 대해 발표하였다.

지난 4월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 열린 '출생통보제 도입촉구'를 위한 간담회에서 여가부, 법무부, 행정부, 보건복지부가 법안 추진상황에 대해 발표하였다.

 
출생한 모든 아동이 출생신고가 되어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에서 태어난 아동은 최소한 그 ‘출생사실’이 공식적으로 기록되도록 하는 ‘출생통보제’ 도입이 필요한 이유이다. ‘출생사실’ 자체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출생미등록 상태라고 해도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에서 누락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7조는 모든 아동은 태어나자마자 정부의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출생신고가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국가와 부모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출생신고가 안 된 유령 아동들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1월 8살 하민이도, 경북 구미의 한 빌라에서 발견된 3세 여아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였다. 이들처럼 태어난 “사실”이 등록되지 않아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유령 아이’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동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이의 시작이 바로 출생신고이다. 출생통보제가 도입된다면 모든 아동의 권리 보장을 위한 보편적 출생등록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출생통보제 도입 계획이 조속히 추진되어 이를 통해 모든 아동이 행복한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관련기사



공유하기
조희경 조희경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아동권리옹호팀장 필진

[조희경의 아동이 행복한 세상] 모든 아동은 행복해야 한다는 미션으로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원고를 시작했습니다. 저개발 국가의 취약아동을 돕는 것을 포함해 한 명의 아동도 낙오하지 않고 모든 아동의 권리를 증진하고 실현하는 것이 보다 궁극적인 미션이라는 생각입니다. 권리의 주체로서 아동이 스스로의 의견을 주요 이해당사자들의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이를 통해 잠재된 스스로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