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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백신 개발 역사에서 읽어야 할 메시지

중앙일보 2021.06.21 00:42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 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 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문명사는 역병(疫病)과의 투쟁이었다. 최초의 역병이자 최장기간 최대 인명피해를 입힌 것은 천연두였다. 16세기 유럽대륙의 정복자들이 신대륙에 전파한 천연두는 치사율이 70~90%였다. 인체의 장기까지 농포로 녹여버리는 끔찍한 천연두는 20세기에도 3억~5억명을 희생시켰다. 근대적 예방접종(vaccination)도 천연두로부터 시작된다. 소젖을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에 착안한 에드워드 제너가 1798년 종두법을 고안했고, 라틴어의 소(vacca)가 백신(vaccine)의 어원이 됐다. 이후 개량을 거치면서 부작용과 접종 기피 등 우여곡절 끝에 1980년 천연두는 지구상에서 퇴치된 유일한 감염병이 됐다(세계보건기구, WHO).
 

문명사는 끔찍한 역병과의 투쟁
지금까지 퇴치된 역병은 천연두뿐
저개발국은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
일회성 지원으론 공동번영 어려워

세계인구 대비 최대 사망자를 낸 팬데믹은 14세기 페스트다. 1346년 아시아 상선에 올라타 유럽에 진출한 쥐떼의 쥐벼룩이 페스트 박테리아를 퍼뜨리면서 절정기(1346~53년)에 세계인구 5억명 중 유라시아 대륙에서 2억명이 희생됐다. 항생제를 적기에 쓰면 치유 가능하나, 해마다 2000여건이 발생하고 있어 재출현 감염병으로 분류됐다. 백신은 1940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게 있었으나 부작용이 심하고 가장 무서운 폐 페스트에는 효능이 없어 1999년 생산 중단됐다.
 
종두법 이후 80여년 지나 루이 파스퇴르가 그 과학적 원리를 밝히면서 광견병(1885년), 콜레라(1896년) 백신 등이 개발된다. 빈곤 감염병이라는 콜레라는 1817년 인도 벵골에서 영국으로 들어가 1차 대유행을 일으켰고, 1854년 런던 대유행 때 존 스노가 ‘나쁜 공기’가 아니라 ‘오염된 물’이 원인임을 밝혀낸다. 아시아에서의 7차 대유행(1961~70년)에 이어 최근까지 예멘 등에서 번지고 있고, 백신은 2016년 FDA가 승인한 백스코라(Vaxchora)다.
 
역사상 최단기간에 최대 사망자를 낸 것은 1918년 스페인독감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팬데믹이 되면서 당시 18억~19억명 인구 중 5억명 감염에 5000만~1억명이 사망했다. 1932년 리처드 쇼프는 돼지 실험 중 감기와 독감이 바이러스 때문임을 밝혀낸다. 1933년 윌슨 스미스의 A형 독감 바이러스 발견 뒤 1세대 1가백신(A형)이 나온다. 1942년 B형까지 듣는 2가백신이 생산돼 제2차 세계대전 중 병사들에게 접종된다. 1978년 3가백신, 2012년 4가백신이 나왔고,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때 한국은 자체 백신 개발로 접종사업을 펼쳤다.
 
감염병의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로 말라리아, 결핵, 장티푸스, 뇌수막염 등의 병원체가 확인된다. 그러나 그중 FDA가 승인한 백신은 뇌수막염(1981년)과 장티푸스(1989년)였고, 말라리아 백신은 아직도 대규모 임상단계에서 사망률을 낮추는 정도다. 결핵은 1909년 BCG 백신 승인을 받았으나 성인에게 잘 듣지 않아 개량단계다. 소아마비는 1955년 주사용 소크 백신과 1961년 경구용 백신 등으로 1994년 서유럽, 2000년 한국 등 서태평양 지역에서 퇴치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체를 알게 된 감염병 중 수두, 홍역, 간염, 로타 바이러스 설사병, 인체유두종 바이러스(HPV, 자궁경부암)는 백신이 나왔다. 간염, 로타, HPV 백신은 개발에 20년 안팎이 걸렸다. 홍역 백신은 1953년 바이러스 확인 후 1963년에 생산돼 1회 접종으로 효능이 수십년 지속되는 특별한 경우다. 우리나라는 2001년 백신 접종사업을 벌여 2014년 홍역 퇴치국이 됐다.
 
10개월 만에 출시된 코로나19 백신 이전까지는 최단기간 개발이 볼거리(유행성이하선염) 백신이었다. 1963년 머크사의 모리스 힐만은 5살짜리 딸이 볼거리에 걸리자 때마침 그의 옆 실험실에서 승인받은 홍역 바이러스 약독화 백신 제조방식을 택해 4년만인 1967년에 성공한다. 1976년 발생한 에볼라의 백신은 2019년 말에야 유럽과 미국에서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지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백신은 아직 없다. 1981년 이후 HIV로 인한 에이즈 사망자는 3800만명에 이른다.
 
백신은 똑같은 종류라도 가격 차이가 난다. 중·고소득 국가에서 이윤을 얻고,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이 지원하는 73개국 저소득 국가에는 저가로 공급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WHO가 승인한 9가지 아동용 백신은 미국에서는 1100~1300달러이나 GAVI는 28달러에 산다. 저개발국은 백신이 없이 전통적 그리고 신종 감염병으로 피해를 입는 가운데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과학기술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화한다. 백신 개발도 예외가 아니다. 앞으로 올 팬데믹에 대비해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백신도 개발해야 하고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치료 백신 개발로 난치병 극복의 신기원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백신의 국가간 빈부격차를 이대로 둔 채 일회성 지원으로는 지구촌의 지속가능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 코로나 백신의 기술혁신을 계기로 진정한 상생의 정신으로 지구촌 보건위기를 공동번영의 기회로 반전시키는 새 역사를 쓸 수는 없을까.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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