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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알 승급뒤엔 노력의 배신 버텼다, 韓발레리나 고생의 맛

중앙일보 2021.06.20 05:00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박세은. 사진은 승급 전인 2018년 공연. [박세은 제공, Isabelle Aubert 촬영, 연합뉴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박세은. 사진은 승급 전인 2018년 공연. [박세은 제공, Isabelle Aubert 촬영, 연합뉴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 느낌표를 붙이신다면, 세상 참 열심히 살아오셨네요. 박수를 드립니다.  
반대로, 물음표를 붙이신다면, 신산한 삶을 살아오셨나 봅니다. 위로를 보냅니다.  
 
노력도 때론 배신합니다. 그런데 이 노력이란 게 참 얄궂어서, 한 번의 배신에 토라져서 아예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주지 않죠. 반면, 노력의 배신에도 주저앉지 않고 상심을 이겨내고 계속 묵묵히 노력한다면, 모종의 보상을 해주는 게 인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뭐라고 이런 인생 철학을 알겠습니까. 지난주, 바다 건너 프랑스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준 발레리나 박세은 씨 덕분에 새삼 깨닫게 된 것뿐이죠. 루이14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1669년에 세운 아카데미를 전신으로 한 파리 오페라 발레(l’Opéra National de Paris)의 수석 무용수인 에투알(l'Étoile)로 승급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발레단이 어떤 곳입니까. 1669년 자칭 ‘태양왕’ 루이14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아카데미를 전신으로 한 유서 깊고 콧대 높은 곳입니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자신들만의 통일된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 자신들이 운영하는 아카데미 졸업생이고 백인 무용수가 아니면 단원으로 잘 받지도 않았죠. 
 
그런 곳에서 박세은 씨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인 최초로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겁니다. 덕분에 저는 세은씨를 승급시킨 이곳의 발레 감독이자, 발레 팬들의 영원한 우상인 오렐리 뒤퐁(Aurélie Dupont)을 인터뷰할 수 있었죠.  

 
오렐리 뒤퐁 공식 사진. [l’Opéra National de Paris]

오렐리 뒤퐁 공식 사진. [l’Opéra National de Paris]

 
뒤퐁 감독은 “세은은 완벽한 모범사례”라면서 “항상 열심이고(travailleuse), 겸손하며(humble), 테크닉이 뛰어나며(technicienne) 예술성이 있다(artiste)”고 칭찬했습니다.

 
서울예고 시절의 박세은. 발레 기본 동작 중 하나인 '파세'의 정석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예고 시절의 박세은. 발레 기본 동작 중 하나인 '파세'의 정석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한 가지 진심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세은 씨가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입단한 것은 2011년입니다. 연수생 자격으로였죠. 그러다 이듬해 바로 정단원이 됐고, 2016년엔 에투알 바로 아래 등급인 제1무용수(le premiere danseuse) 자리를 꿰찼습니다. 사실 이 자리까지 올라갔다면, 세은 씨의 실력을 고려할 때 에투알 승급은 머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노력이 배신을 했죠. 세은 씨의 승급 소식은 5년 동안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세은 씨는 30대가 됐습니다.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극강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발레는 20대가 최고의 전성기라는 말이 있죠. 본인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물론 요즘은 30대를 넘어 40대까지도 승승장구하는 무용수들이 많습니다만.
 
 
왜 그렇게 오래 걸렸던 걸까요. 2016~2017년에 답이 있었습니다. 세은 씨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한정호 에투알 클래식 대표의 설명으로 수수께끼는 풀렸습니다. 이때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겐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발레리나의 내적 갈등과 파멸을 다룬 영화 ‘블랙 스완’ 아시죠. 이 영화에서 실제 주연배우 나탈리 포트먼의 상대 발레리노로 열연했던 벵자맹 밀피예라는 무용수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시티발레단에서 경력을 쌓아온 그를,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발레 감독으로 깜짝 영입을 합니다. 발레단 나름의 혁신 노력의 일환이었죠. 
 
문제는, 밀피예가 발레단에 극약 처방을 쓰면서 갈등이 표면화했다는 겁니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만의 레퍼토리 대신 미국식 현대무용 작품을 적극 도입하고, 무용수도 급을 무시하고 등용시키기 이르죠. 이 과정에서 세은 씨는 기존의 강점으로 인정받았던 고전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자주 빼앗겼다고 합니다. 무대에 서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승급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건 당연지사죠. 매일 무대에 서기 위해서 피 땀 눈물을 흘렸을 세은씨의 노력이 배신당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박세은의 멋진 아티튀드 동작. [중앙포토]

박세은의 멋진 아티튀드 동작. [중앙포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은씨는 토슈즈 끈을 고쳐 맵니다. 당찬 모습도 선보이는데요. 바로 밀피예 감독에게 직접 찾아가 면담을 요청한 겁니다. 나의 어떤 점이 부족한지, 나에게 어떤 불만이 있는 건지를 면대면으로 묻는, 그야말로 정면돌파죠. 속으로만 괴로워하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뒷담화를 하는 범인(凡人)들과는 180도 달랐습니다.  
 
밀피예 감독도 이 점을 높이 샀다고 합니다. 세은 씨를 이후 현대 발레 무대에 자주 캐스팅했고, 세은 씨는 타고난 재능에 노력에 노력을 더해서, 멋진 무대로 보답하죠. 이러다 세은 씨가 현대 발레에만 나오는 거 아니냐는 걱정 아닌 걱정까지, 그의 지인들 사이에선 나왔을 정도라고 하네요.  
 
그러나 이런 노력 역시 또다시 배신당하고 맙니다. 밀피예 감독이 갑자기 “나 안 해!”라고 선언하고 사표를 던져버린 거죠. 당시 뉴욕타임스(NYT) 기사를 찾아보니 발레단의 전통 고수 분위기에 진저리를 낸 것이란 설이 있더군요. 그외에도 부인인 나탈리 포트만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는 등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쁜 건 아무리 봐도 안 질리죠. '오네긴'에서 주역 타티아나로 열연 중인 세은씨 [박세은 제공, Isabelle Aubert 촬영, 연합뉴스]

예쁜 건 아무리 봐도 안 질리죠. '오네긴'에서 주역 타티아나로 열연 중인 세은씨 [박세은 제공, Isabelle Aubert 촬영, 연합뉴스]

 
세은 씨로서는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에투알 승급을 목전에 두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도 볼 수 있었죠. 그러나 세은 씨는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나 걸려 드디어 2021년 6월10일, 세은 씨가 주역으로 열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끝난 뒤, 발레단은 깜짝 발표를 합니다.
“뒤퐁 감독의 강력한 지원으로, 박세은을 에투알로 승급합니다.”
눈물을 참지 못하는 박세은 씨를 보며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발레 팬들이 같이 울었습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EBS에서 방송하는 '맛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의 스토리도 기대해주세요. 신계숙 교수가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울릉도를 질주하며 "고생해야 더 단단해지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가 서울 후암동 연구소에서 웍으로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 다음주 중 중앙일보에서 자세한 소식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김상선 기자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가 서울 후암동 연구소에서 웍으로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 다음주 중 중앙일보에서 자세한 소식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김상선 기자

 
노력이며 인생에 대해 쓰면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넣어야 하는) 제 프로필 사진을 보고 “젊은 게 뭘 안다고”라고 생각하실 몇몇 분들입니다. 우선, 어리게 봐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을 모두 사진 촬영의 귀재이신 중앙일보 사진기자 선배들께 돌립니다. 그러나 그 사진이 과연 지금 현재의 사진일까요? 그리고 만약 지금이라고 해도, 젊고 또 여성이라고 해서 세상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모로, 물음표만 늘어가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확실한 것 한 가지.  
박세은 발레리나는 오늘 하루도 묵묵히 토슈즈의 끈을 묶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죠. 신계숙 교수도 묵묵히 웍을 달구고, 할리 데이비슨의 핸들을 잡고 있을 겁니다.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다음 주도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전수진 투데이ㆍ피플 뉴스팀장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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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전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