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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직장 괴롭힘 신고하니···블라인드서 마녀사냥 시작됐다

중앙일보 2021.06.15 05:00
지난해 10월, 김모(29·여)씨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하는 김씨가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 회사의 조사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해당 글에는 김씨의 신고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글 작성자는 "후배라는 이유로 보호받고 신고한다면서 오히려 선배를 협박하려 든다"며 김씨 없이 일하고 싶다고 적었다. 갑질이 아니라 관습이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괴롭힘 신고했는데 블라인드서 '2차 가해'" 

해당 게시물에 대한 지난해 10월 블라인드 댓글 모음. [블라인드 캡쳐]

해당 게시물에 대한 지난해 10월 블라인드 댓글 모음. [블라인드 캡쳐]

김씨는 "괴롭힘을 해결해달라고 회사에 신고했는데 블라인드에서 또 다른 괴롭힘이 시작됐다"면서 "2차 가해가 이어져 고통스러웠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씨의 회사 블라인드는 "김씨가 부적응자로 피해자인 척을 해선 안 된다"는 내용과 "2차 가해 그만하라, 괴롭힘이 있었고 해당 지사의 조직문화가 문제"라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김씨는 인턴을 거쳐 2018년 꿈꾸던 직장에 카지노 딜러로 입사했다. 돈을 다루는 일의 특성 때문인지 선·후배 간 기수문화가 강했다고 한다. 김씨는 동기 중 맏언니로 기수 대표를 맡을 정도로 무던한 성격이었다.  
 

"식사 제한 회식 강요 등 부조리에 따돌림"

[중앙포토]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김씨 측이 고용노동부에 제출한 진정서에는 '입사 이후 김씨가 선배들로부터 여성직원 휴게실에서 취식과 컴퓨터 사용을 금지당했고, 식사 시간 제한과 회식 강요, 또 선배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따돌림을 당했다'는 주장이 담겼다. 김씨는 함께 일하는 선배에게 이런 괴롭힘을 호소했고, 선배는 김씨의 신고를 도왔다. 
 

회사 "증거 부족…블라인드 괴롭힘 유감"

조사를 마친 회사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고, 김씨에 대한 심리상담과 치료를 지원하고 회사 전반적인 조직문화를 개선하겠다"고 김씨에게 통보했다. 노동부 산하 해당 노동청 또한 "회사가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회사 관계자는 "주장이 엇갈리고 괴롭힘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면서 "다만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식 교육과 조직문화 개선 교육을 하고 외부 컨설팅을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회사가 김씨에게 보낸 통보서 내용 일부. 김씨 제공

회사가 김씨에게 보낸 통보서 내용 일부. 김씨 제공

신고 이후 블라인드에서 일어난 '2차 가해' 논란에 대해 회사는 "그 부분은 저희도 유감스럽고 공감한다. 하지만 앱 특성상 글 작성자를 알 수 없고, 조사를 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려워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의를 줬다"고 설명했다. 
 
김씨 측은 "회사가 2019년 7월 '직장내괴롭힘금지법' 시행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 괴롭힘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블라인드에서 김씨가 괴롭힘당한 것은 회사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회사에서 초기 병원비와 심리치료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말이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적응 장애로 정신과 치료, 가해자는 승진 

직장갑질119 회원들이 지난해 7월 ‘갑질금지법’ 개선을 촉구하는 모습. [뉴시스]

직장갑질119 회원들이 지난해 7월 ‘갑질금지법’ 개선을 촉구하는 모습. [뉴시스]

김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적응 장애를 진단받고, 약물과 면담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김씨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고, 산재 신청을 했다. 김씨가 병가를 내고 치료를 받는 사이 가해자로 지목된 김씨의 선배들은 아무런 징계처분 없이 각각 주임과 대리로 승진했다. 
 
직장갑질119 대표 권두섭 변호사는 "가해자가 여럿인 사건은 은폐가 쉽다. 피해자가 업무상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해도 따돌림과 폭언이 허용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녹취 파일이 없어도 주장이 일관적, 구체적이고 주변에 지속해서 괴롭힘을 호소한 증거가 있으면 신빙성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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