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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억달러 들인 미 핵폭탄 기밀, 소·영에 넘긴 ‘이중간첩’

중앙선데이 2021.06.12 00:20 740호 26면 지면보기

[세계를 흔든 스파이] 독 이론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

현재 전 세계에 정식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 등 5개국이다. 이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누린다. 국제정치에서 핵무기의 비중을 보여준다.
 

나치 박해 피해 이주 난민 출신
미·영·캐나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

45년 일본 투하 세계 첫 원폭 개발
비밀 정보 영·소련에 잇따라 제공

50년 들통나 체포된 뒤 9년 복역
동독으로 추방돼 ‘영웅’ 대접받아

이론물리학 영역에 있던 핵폭탄을 무기로 완성한 나라는 미국이다. 1942년 8월 13일~47년 8월 15일 동맹인 영국·캐나다와 함께 맨해튼 계획을 수행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4발을 제작했다. 미 원자력위원회(AEC·46~75년 활동)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은 47년까지 모두 24억 달러를 투입했다. 2020년 가치로 275억 달러에 이른다. 비용과 의지, 그리고 오랫동안 축적한 과학기술력이 합쳐져 이룬 성과였다. 이렇게 이룬 세계 최초 핵무기 개발의 정보를 대놓고 ‘훔친’ 스파이들이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입수한 정보를 소련에 넘긴 ‘원자탄 스파이’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론물리학자로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기체확산법 개발 작업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1911~88년)다. 독일 공산주의자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난민’ 출신이다.
 
미, 49년 소련이 핵실험 성공하자 수사
 
1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ㆍ영국ㆍ캐나다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계획에 이론물리학자로 참가했다가 정보를 빼돌려 소련에 넘긴 클라우스 푹스와 핵 폭발 장면. 2 미국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의 폭발 장면. [사진 미국 원자 유산 재단]

1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ㆍ영국ㆍ캐나다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계획에 이론물리학자로 참가했다가 정보를 빼돌려 소련에 넘긴 클라우스 푹스와 핵 폭발 장면. 2 미국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의 폭발 장면. [사진 미국 원자 유산 재단]

영국 협력팀의 일원으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푹스는 그중 가장 비중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2017년 나온 『세계를 바꾼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 물리학자이자 이중스파이』를 쓴 영국 군사 저술가 마이크 로시터는 “푹스가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했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영국 옥스퍼드셔의 국가기관인 하웰 원자력 연구소((AERE)에서 이론물리실장으로 일하던 50년 2월 체포됐을 때다. 적용된 혐의는 소련에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비밀 정보를 넘겼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놀라운 사실은 그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난 다음에야 드러났다. 로시터는 영국·미국·러시아·독일의 문서보관소를 뒤진 끝에 푹스가 미국에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해 활동하면서 영국을 위해서도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영국도 핵무기 개발에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동맹국을 상대로 정보 수집을 했다. 푹스는 은밀하게 모은 기밀 정보를 ‘이념의 조국’인 소련에도 제공한 이중 스파이였다.
 
2019년 발간된 푹스의 전기 『트리니티: 반역과 역사상 가장 위험한 스파이 되기』의 저자 프랭크 클로즈는 그를 가리켜 ‘소련이 핵무기 경쟁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게 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푹스는 공산주의자 집안 출신이다. 부친 에밀은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면서 1912년부터 독일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푹스는 30년 라이프치히대에 입학해 수학·물리학을 공부하다 부친이 학교를 옮기면서 따라서 킬 대학으로 전학을 갔다. 대학 시절 독일 공산당에 입당해 맹렬하게 활동했다.
 
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다. 37년 브리스톨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42년 영국 핵 개발 프로그램인 ‘튜브 알로이스’에 참여하면서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43년 소련 군사정보부(GRU) 요원이 접근해오자 정보를 넘기기 시작했다.
 
클라우스 푹스 인생

클라우스 푹스 인생

그는 44년 영국이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협력하면서 뉴욕의 컬럼비아대로 가서 우라늄 농축을 위한 기체확산법 연구에 참여했다. 그 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원 이론물리실에서 일하면서 나중에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탄인 팻맨의 제조에 참여했다. 45년 원자탄 개발과 투하에 이어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푹스는 46년 귀국해 하웰 원자력 연구소((AERE)의 이론물리실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방첩기관은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결국 푹스는 50년 1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자백과 재판 끝에 징역 14년을 선고받고 영국 국적이 박탈됐다. 아이로니컬한 점은 이 원자탄 스파이에게 스파이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핵 정보를 넘기긴 했지만, 당시엔 소련이 적국이 아니라 나치에 함께 대항하는 동맹국이어서 이를 적용할 수 없다는 법 논리였다. 다만 기밀 준수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최고형인 14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소련은 동맹국, 스파이 혐의 빠져
 
9년 4개월을 복역한 끝에 59년 모범수로 석방돼 동독으로 추방됐다. 그가 도착한 동베를린의 쇠네펠트 국제공항에는 대학 시절 공산당 활동을 함께했던 그레테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해 결혼했다. 난민인 자신을 받아준 영국을 배신하고 스파이가 된 이유는 이념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었을까. 둘 다였을까?
 
동독에서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고위 관료와 과학 연구소 간부를 지내며 ‘영웅’ 대접을 받던 푹스는 79년 은퇴하고 88년 동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독일이 통일됐다. 91년엔 소련이 붕괴했다. 소련은 충성스러운 스파이를 동원해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핵은 체제의 붕괴를 막아주지 못했다.
 
미군 입대해 핵시설 근무 코발, 개발 정보 소련에 넘겨
조지 코발

조지 코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들어가자 소련은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해 관련 정보를 빼내려고 시도했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공산주의자 과학자를 활용한 것은 물론 미국에 파견한 스파이를 핵 개발 시설에 심으려고 혈안이 됐다. 그중 잘 알려진 사례가 조지 코발(1913~2006년·러시아어로 카발)이다. 조지 코발은 옛 러시아제국에서 박해를 피해 1910년 미국에 이민한 유대인 부모 밑에서 13년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소련의 스탈린이 중국과 국경을 맞댄 극동지역 아무르 강 유역에 ‘유대인 자치주’를 설립하자 유대인 공동체 정착을 꿈꾸며 그곳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러시아어 실력을 키운 코발은 39년 모스크바 화학기술대를 졸업하고 붉은 군대에 징집됐다. 당시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군은 물론 정보기관까지 인재 기근 사태를 겪었다. 코발은 군사정보국(GRU) 소속으로 훈련을 받고 미국에 정보 요원으로 파견됐다. 원래 미국 시민이기 때문에 잠입에 문제가 없었다. 그는 43년 미군에 징집된 뒤 커뮤니티 대학을 다닌 것처럼 서류를 위조해 화학 요원으로 뉴욕 시립대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44년 테네시 주 오크리지에서 원자력 설비 담당으로 근무했다. 미국 맨해튼 계획의 핵심 연구 시설이다.
 
소련은 코발의 보고로 미국이 핵 개발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발은 근무 중일 때는 정보보고를 중단하고, 휴가를 나갈 때만 소련에 핵무기 개발 정보를 전송해 보안요원의 감시를 피했다. 소련이 나중에 첼랴빈스크 등에 세운 핵 시설은 오크리지 연구소와 비슷한 점이 수두룩했다. 코발이 제공한 시설과 설비 정보에 얼마나 크게 의존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근거다.
 
코발은 45년 6월 오하이오 주 데이턴의핵 개발 시설로 전근을 갔다. 그곳에선 핵폭발 연쇄반응에 필요한 폴로늄·우라늄·플루토늄 등 방사성 물질의 처리와 생산 과정, 그리고 필요한 분량을 연구하는 비밀 프로젝트인 ‘데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핵 개발을 크게 앞당길 수 있는 해당 정보는 고스란히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미국은 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인 ‘트리니티’를 터뜨리는 핵 실험을 했다.
 
그해 일본의 항복으로 제대한 그는 48년 뉴욕시립대를 졸업한 뒤 스파이 활동과 관련한 체포를 피하기 위해 소련으로 귀환했다. 당시 미 정보당국은 방첩 활동을 통해 귀순자로부터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지만, 체포의 기회는 놓쳤다. 미 정보 당국은 그가 스파이일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이를 60년간 묻어뒀다.
 
소련은 이듬해 8월 29일 핵실험을 하고 미국에 이어 핵보유국이 됐다. 미국 정보기관은 소련이 50~53년은 돼야 핵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코발 등의 정보가 이를 앞당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코발은 화학 분야 박사 학위를 받고 모스크바 화학기술대 교수로 일하다 70년대 후반 은퇴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인 99년 미국에 2차대전 참전용사 연금을 신청했다가 거부됐다.
 
코발은 궁핍한 생활을 하다 2006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는 2007년이 돼서야 그의 스파이 공적을 기려 영웅 칭호를 추서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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