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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 "대사에 밤잠 설쳤다"는 뮤지컬…미국 코미디 한국화 특급작전

중앙일보 2021.06.09 14:18
뮤지컬 '비틀쥬스'의 브로드웨이 공연 장면. [사진 BRIGHTMAN/Matthew Murphy, CJ ENM]

뮤지컬 '비틀쥬스'의 브로드웨이 공연 장면. [사진 BRIGHTMAN/Matthew Murphy, CJ ENM]

 
“이 친구가 말이 굉장히 많아요. 그 대사를 다 외워놓으면 단어 하나, 아니면 문장 전체가 다시 바뀌곤 했어요. 그래서 12시간 이상씩 연습하고, 자다가도 새벽에 갑자기 눈떠서 혼자 중얼중얼 대사를 반복하고 또 하고….”

18일 개막하는 '비틀쥬스'

 
배우 유준상이 8일 기자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18일 개막하는 뮤지컬 ‘비틀쥬스(Beetlejuice)’에서 비틀쥬스 역으로 출연한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한국판이다. 그는 “지금도 스태프들이 단어 몇개를 놓고 고민하면서 고치고 있다. 지금도!”라며 “우리 입장에서 가사 하나 바뀌면 ‘멘붕’이라 아주 어려운 작업”이라며 웃었다.
 
‘비틀쥬스’는 2018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시험 공연을 시작해 이듬해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그해 토니 어워즈에서 8개 부문 후보가 되는 등 관심을 모았고, 뉴욕타임스는 2019년 10월 ‘비틀쥬스’ 등장인물 코스프레 축제가 열린 날의 열기를 묘사하며 이 작품의 인기를 전했다.
 
어둡고 환상적인 세계를 그리는 팀 버튼의 1988년 같은 제목 영화가 원작이다. 당시 한국 개봉 제목은 ‘유령 수업’. 갓 사고사를 당한 부부의 유령이 집을 지키기 위해 새로 이사온 사람들을 겁준다. 여기에 약 98억년 된 유령 비틀쥬스가 끼어들어 유령 부부에게 유령 수업을 펼친다. 수다스러운 비틀쥬스는 산 자에게 이름이 세 번 불려 사람이 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뮤지컬은 영화에 비해 비틀쥬스의 분량이 대폭 늘어났고, 이사온 부부의 10대 딸인 리디아의 내면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 공연은 ‘비틀쥬스’의 첫 해외 무대고, 관건은 문화의 호환이다. ‘비틀쥬스’에는 풍자적 유머가 가득하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머로 우회해 다루기 때문이다. 말장난, 허풍, 비꼬기를 쓰는 블랙 코미디가 주를 이룬다. 따라서 영어로 돼 있는 맵싸한 유머를 한국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유준상이 “멘붕”을 호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공연의 협력연출인 매트 디카를로는 본지와 서면 인터뷰에서 “미국에서처럼 한국 관객도 웃게 할 수 있는 과정을 시작했다”며 미국식 블랙 코미디의 한국화 과정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한 노래에는 ‘NPR(National Public Radio, 미국 공영 라디오) 토트백’이라는 가사가 있다. 하지만 한국 공연에서는 다른 말로 바꿔야 했다.” 토트백은 미국 공영 라디오의 후원자들에게 나눠준 가방이었는데, 2015년 이후 ‘개념 소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됐고, 뮤지컬의 노래는 사람들의 이런 행동과 유행을 풍자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알지만 한국에선 생소하다. 디카를로는 “다행히도 매우 재미있는 한국어 번역을 찾아 모두가 웃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제작진 측은 “한국에서 친숙한 로고송을 가진 한 브랜드를 언급하도록 각색했다”고 귀띔했다.
 
또 원작의 노래 가사 중 “다들 여기서 잘 지내. 로저스, 하트, 해머스타인처럼(Like Rodgers, Hart and Hammerstein)”이라는 부분에서 미국인들은 대부분 웃는다. 미국 뮤지컬계의 유명한 창작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익숙지 않기 때문에 “지저스, 부처, 각종 예언자, 신은 죽었다던 니체”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뮤지컬 '비틀쥬스'의 주연 유준상 배우. [사진 CJ ENM]

뮤지컬 '비틀쥬스'의 주연 유준상 배우. [사진 CJ ENM]

 
이처럼 미국에서 히트한 작품의 한국화는 ‘언어 번역’ 보다는 ‘문화 번역’ 수준에 가깝다. 한국어 대본을 맡은 김수빈 번역가는 “미국에서는 누구나 알지만 한국에서는 낯선 개념 때문에 캐릭터까지 바꿔야했다”고 했다. 새로 이사온 사람인 델리아의 원래 직업은 ‘라이프 코치’. 김수빈은 “마치 우리가 ‘무당’이라는 말에 이미지를 바로 떠올리듯 미국인들이 ‘라이프 코치’에 자동으로 연상하는 인물상이 있다고 한다”며 “원작자와 상의해 캐릭터를 수정했다”고 했다. 라이프 코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됐다.
 
또 유령 사이의 관계에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직장 문화’ ‘선후배’같은 요소를 집어넣어 관객과 밀착했다. ‘비틀쥬스’의 이름이 세 번 불릴듯 말듯 궁금하게 만드는, 밀고 당기기도 작품의 묘미다. 영어 공연에서는 B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나열하며 빠르게 말장난을 이어가 관객을 웃게 했다. 한국어 버전에서는 재치 있게 찾아낸 ‘비참’ ‘비록’ ‘비즈니스’ 같은 단어들이 대응한다.
 
‘비틀쥬스’는 또한 미국에서 인기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비틀쥬스가 갑작스럽게 극에서 빠져나가 현실적인 내용을 짧고 위트있게 풍자하는 부분들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이런 장치를 위해 김수빈은 “기분 좋은 매운 맛의 말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 줄 대사 안에서도 단어와 호흡을 바꿔가며 가장 적합한 조합을 위해 원작자들과 끊임없이 협의한다”고 말했다. 이제 서로 다른 문화의 관객들이 같은 지점에서 폭소할 수 있을까. 유준상과 정성화가 더블 캐스팅된 ‘비틀쥬스’는 8월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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