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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으로 표현한 강건한 시대정신…일중 탄생 100주년 특별전

중앙일보 2021.06.09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김충현이 1987년에 쓴 삼연(三淵)의 시.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김충현이 1987년에 쓴 삼연(三淵)의 시.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목’, ‘국필(國筆)’로 불린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은 전국 곳곳의 현판과 묘비 비문 등에 글씨를 남겼다. 경복궁 건춘문, 유관순 기념비, 이충무공 한산도 제승당비, 한강대교 표석, 김소월 시비 등이다. 글씨에 시대정신을 담고자 했던 여정은 그의 독보적인 글씨체인 ‘일중체(一中體)’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서울 백악미술관 150점 선보여
웅장하고 늠름한 한글 고체 창안
서체 혼융, 독보적 ‘일중체’ 일궈

김충현 탄생 100주년 특별전 ‘一中, 시대의 중심에서’가 8일 서울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년)가 마련한 전시로 글씨와 탁본, 서첩 등 자료 150점을 통해 일중의 삶,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1934년 13세였던 일중이 집 안에 있던 선대의 친필 간찰과 시고 등을 모아 장첩한 책자, 1938년 17세에 쓴 한글작품 등 전시장은 마치 박물관의 유물전을 방불케 한다.
 
천경자가 그림 그리고 일중이 제호를 쓴 이희승 시집 『박꽃』(1953) 표지.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천경자가 그림 그리고 일중이 제호를 쓴 이희승 시집 『박꽃』(1953) 표지.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12세 때 안진경체와 궁체를 익힌 일중은 동생인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과 함께 20세기 한국 서예를 이끈 양대산맥이었다. 1942년 『우리 글씨 쓰는 법』을 펴냈고 궁체,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을 연구해 ‘한글 고체(古體)’를 창안했다. 한문 서예에선 전(篆), 예(隸), 해(楷), 행(行), 초(草) 각 서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지만 그는 늘 ‘국한문서예의 통합’을 꿈꿨다. 특히 한글 고체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고판본에서 착안한 서체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김충현이 창안한 용어다. 이를 통해 그는 고판본이 하나의 서체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을 후대에 열어줬다.
 
전시는 일중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한글과 한자 서예 두루 능통한 드문 작가였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일중의 서예 궤적은 한글과 한문을 오가며 발전해간 과정”으로 요약했다.
 
김현일 백악미술관장은 “일중은 10대에 전조선남여학생작품전에 한글 궁체작품과 한문 해서 작품을 함께 출품했는데, 이는 국한문서예에 대한 균형이 김충현의 서예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김기창이 그린 일중 초상.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김기창이 그린 일중 초상.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이번 전시에선 김충현의 초창기 한글 고체 작품 ‘용비어천가’(1960)도 볼 수 있다. 고판본 자형에 전·예서의 필획을 가미하고 한글 가사와 한시 번역을 나란히 배치한 게 특징이다. 김 관장은 “해방 직후부터 교단에서 국문학을 가르친 김충현은 한글과 한문이 어우러져야 작품의 온전한 감상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며 “‘용비어천가’야 말로 한글 고체와 한문 행서의 조화로 김충현의 뜻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국한문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일중이 한국 문화에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일중체’의 확립이다. 이번 전시에선 1970년대 말 ‘일중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고려 말 성리학자 이색(1328~1396)의 시 『서대행』을 12폭 병풍에 담은 대작도 공개된다.
 
한편 삼연 시(三淵詩·1987)는 이번 전시의 핵심으로 각종 서체를 한 화면에 구성한 작품이다. 김 관장은 “일중은 다양한 서체를 익히고 법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구사하는 작품을 서예가 추구할 방향으로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 밖에 박래현, 천경자, 정종여, 김은호 등이 그린 표지에 김충현의 제호가 더해진 책들도 전시에 나왔다. 김현일 관장은 “일중의 행보와 궤적은 우리에게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가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면서 “일중은 자신의 호처럼 서예 하나만을 충심으로 섬기며 꿋꿋하게 나아간 분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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