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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잇고자 했던 소지도인, 마지막 작품은 ‘아름다울 미’

중앙일보 2021.06.08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2012년 LA자택에서 본지가 만난 소지도인. 1970년대 이민 간 선생은 세속을 멀리하며 일생 붓글씨에 전념했다. [중앙포토]

2012년 LA자택에서 본지가 만난 소지도인. 1970년대 이민 간 선생은 세속을 멀리하며 일생 붓글씨에 전념했다. [중앙포토]

“온전히 글씨를 배워옴이 이미 70여년, 비록 역대 이름난 필적을 두루 공부하며 대략적으로 눈여겨보고 뜻을 새기어 본받아 써 보았건만, 이제 늙음에 이르러 여전히 옛사람과 떨어져 있으며 더욱 멀어짐을 깨닫게 되니 이를 어찌할지 지극히 탄식하노라.”
 

한국 서예 거장 강창원 특별전
유족 기증품 등 200여 점 선보여
안진경체 대가, 말년 추사에 매진
매일 종이 한장을 100장으로 잘라
하나하나 써내려간 치열한 붓놀림

소지도인(昭志道人)으로 불린 서예가 강창원(姜昌元, 1918~2019)이 90세 즈음 남긴 글이다.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평생 필획에 전념했건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스스로 채찍질했다. 대쪽 같은 곧은 자세로 종이만 보이면 가리지 않고 매일 붓을 놀린 그가 100세에 남긴 마지막 작품은 아름다울 미(美). 기력이 쇠한 탓인지 낙관도 하지 않고 한 글자만 어린아이가 그리듯이 썼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남긴 봉은사 현판 글씨 ‘판전(板殿)’과 같은 동자체의 경지다.
 
소지도인 강창원이 92세 때 추사를 잇겠다는 포부를 밝힌 글귀 ‘장지희지이선거 추사소지현동풍’. [사진 추사박물관]

소지도인 강창원이 92세 때 추사를 잇겠다는 포부를 밝힌 글귀 ‘장지희지이선거 추사소지현동풍’. [사진 추사박물관]

법고창신(法古創新) 하는 추사의 정신을 20세기에 가장 잘 되살렸다고 추앙받는 한국 서예의 거장 강창원의 주요 작품을 만나는 특별전이 지난 5일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그의 작품만 따로 모은 건 2017년 100세를 기념한 인사동 희수갤러리 전시에 이어 4년만. 미국 LA에 은거하던 그는 고령으로 전시에 오지 못했고 2년 후 유명을 달리했다. 사후 첫 회고전 성격도 띠는 이번 전시에선 총 200여 점이 선보인다. 큰 글씨, 작은 글씨와 서첩, 관련자료 등 3부 구성으로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간 은자의 일대기를 일별한다.
 
2006년 쓴 ‘취하고 나서 장욱에게 시를 지어주다’. [사진 추사박물관]

2006년 쓴 ‘취하고 나서 장욱에게 시를 지어주다’. [사진 추사박물관]

전시는 지난해 소지도인의 유족이 주요 작품과 서책, 사진 등 1000여 점을 추사박물관에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됐다. 기증품은 1970년대 그가 LA로 이주한 후 국내 서예가들과 주고받은 연하장, 서도강연회 원고(1975년), 갑골문 등의 임서(臨書, 베껴씀) 자료 등도 아우른다. 20세기 한국 서예사를 재구성하는 사료적 가치도 있다.
 
이순신의 ‘한산도야음’(2007)은 쓰고 또 썼다. [사진 추사박물관]

이순신의 ‘한산도야음’(2007)은 쓰고 또 썼다. [사진 추사박물관]

소지도인의 애제자로, 작품 기증을 매개하고 이번 특별전 기획에 함께 한 김종헌 전 남양비비안 사장은 “기증품 외에도 선생의 서예관을 집대성해 보여주는 작품들을 여러 소장가로부터 대여해 모았다”고 했다. 전시를 담당한 허홍범 학예연구사는 “19세기 추사가 소전 손재형, 검여 유희강 등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소지도인에 이르는 서예사의 흐름도 엿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추사를 따르되 베끼지 않는다
 
우리 국호를 모아 원형 안에 쓴 ‘고려 조선 대한민국’(2000년대). [사진 추사박물관]

우리 국호를 모아 원형 안에 쓴 ‘고려 조선 대한민국’(2000년대). [사진 추사박물관]

“장지와 왕희지는 이미 앞서갔다. 추사와 소지 두 사람이 동방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전시회 도입부터 압도하는 ‘추사소지현동풍’(2009)이다. 92세 때 지은 글로 가로 70㎝, 세로 170㎝ 한지에 대련 형태로 썼다. 중국 후한말 초서의 대가 장지(張芝, ?~192)와 오늘날까지 명필의 대명사로 통하는 서성(書聖) 왕희지를 추사 김정희가 이었고 이제 자신이 잇겠다는 포부다. 초년 시절 단련한 안진경체에 바탕하고 이후 독창적으로 연마한 전서와 해서체로 호쾌하게 써내려간 작품에선 예향을 넘어 결기까지 풍긴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쓴 ‘완당론’을 필사한 작품(2008)도 선보인다. 위창이 우리나라 주요 서화가의 삶과 예술을 연대순으로 소개한  『근역서화징』 가운데 김정희 부분을 가로 130㎝ 정도의 한지에 썼다.
 
100세에 남긴 마지막 작품 '美' [사진 추사박물관]

100세에 남긴 마지막 작품 '美' [사진 추사박물관]

일찍이 소지도인은 안진경체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추사에 매진했다고 한다. 강창원 평전  『추사를 따라 또 다른 길을 가다』(중앙북스)를 낸 김 전 사장은 “선생은 2007년 졸수(卒壽) 이후 추사서법과 학예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을 분명히 했다”고 회고했다. 정작 남긴 작품 중 추사체를 임서한 건 거의 없다. 이미 소지체를 완성한 상태에서 그가 따르려 한 것은 말년까지 늘 새롭고자 한 추사의 법고창신 정신이어서다. ‘추사가 제주도 귀양 가는 바람에 추사체를 이뤘듯 나도 내 발로 인사동 떠나서 LA 갇혀 사는 덕에 장수하고 공부 많이 했다’고 거리낌 없이 회고하기도 했단다.
 
“당시 서예가들은 인사동에서 술 마시며 어울리길 즐겼는데, 평생 국전을 외면하고 야인을 자처했던 선생은 거기서도 벗어나려 했다. LA에서 세속적 삶을 멀리한 채 매일 아침 종이 한장을 100장으로 잘라 하나하나에 썼으니 그처럼 치열했던 서예가가 또 누가 있겠는가.”(김종헌 전 사장)
 
쓰고 또 쓰고, 가리지 않고 쓴다
 
과천 추사박물관 특별전 들머리를 장식한 ‘천사수복’(2010). [사진 추사박물관]

과천 추사박물관 특별전 들머리를 장식한 ‘천사수복’(2010). [사진 추사박물관]

1918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강창원은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살면서 서예 스승 양소준(楊昭儁)을 만났다. 안진경체에 통달한 것도 어린 시절 안진경의 ‘쌍학명첩’ 임서로 서예에 입문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북평사범대학(현 북경사대) 졸업 후 1943년 조국에 돌아와선 검여 유희강, 소전 손재형,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청명 임창순, 연민 이가원 등과 서예활동을 했다. 중국어에 통달한 데다 격조 있는 고문으로 명망이 높았으니 그가 인사동에 운영한 서실 ‘임지헌’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 모든 걸 떨치고 LA 이민 후엔 본연의 글쓰기에만 정진했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쓰고 또 쓰고’가 엿보이는 소품들이 눈길을 끈다. 가로 30㎝, 세로 7~8㎝ 크기 화선지를 잘라 쓰거나 피자 박스 같은 종이상자, 포장지도 즐겨 활용했다. 제일 잘 알려진 작품이 ‘달제어’(2009)다. 일본의 유명 사케 닷사이(獺祭, 달제)를 친구와 마신 후 그 포장지에 쓴 글귀다. “이 종이는 포장지로 비록 화선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역시 이와 같이 써지지 않는가? 웃지 마시라! 92세 소지도인이.” 마치 담뱃값 종이에 그리길 즐긴 이중섭의 은지화를 연상시키는 소품들이다. “의도적으로 작품을 하겠다는 의식을 넘어 천연의 본성을 잘 드러낸 자연스러운 글씨”(이종덕 박사, 추사 및 한글 고어·간찰 전공)라는 평이다.
  
일필휘지에 담은 신념
 
국·한문 혼용 ‘완유헌갤러리’(2000년대)등 각종 서첩과 소품류 총 200여 점이 선보인다. [사진 추사박물관]

국·한문 혼용 ‘완유헌갤러리’(2000년대)등 각종 서첩과 소품류 총 200여 점이 선보인다. [사진 추사박물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것이 나의 여정인가 한다.” 소지도인은 2005년 88세를 맞아 연 미수전(米壽展)에서 이런 소감을 필묵으로 남겼다. 그의 작품을 아끼는 이들은 그의 서예 세계가 활짝 핀 때는 80 이후라고 말한다. “그림은 몇 번을 덧칠할 수 있지만 글씨는 단 한 번에 써내려가야 한다”는 지론이, 평생 연마한 붓놀림과 꾸준한 건강관리로 노년에 절정을 이뤘단 얘기다.
 
그런 자유로움과 원숙미가 빛나는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 90세 전후에 쓴 ‘고려 조선 대한민국’은 조롱박 같은 갸름한 원형 안에 우리의 대표 국호 셋을 정감있게 구사했다. “백두산의 천지는 고요하고, 한라산 연못과 폭포는 우렁차네”란 글귀의 ‘백두·한라 오언연구’(2006)나 그가 평생 거듭해 되풀이 쓴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야음’에선 몸은 멀리 떨어졌어도 부강한 대한민국을 기원한 마음이 엿보인다.
 
안타깝게도 소지도인은 한글 작품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한자·한글 혼용체로 선보인 ‘완유헌갤러리’(2000년대) 정도다. 김 전 사장은 “전통파이자 정통파였던 선생은 평생 옛 문헌을 공부하고 최치원, 김삿갓 등의 우리 한시를 즐겨쓰면서도 한글은 다음 세대 몫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서한 등을 통해 “현대적 기풍을 담은 품격있는 서예글씨가 탄생되길 기대한 소지도인의 진심이 느껴졌다”(서경대 이복규 인문대학장)는 평이다. 19세기 추사를 따르되 넘어서고자 한 20세기 소지도인. 이를 이을 21세기 붓의 주인은 누구일까. 전시는 8월 8일까지.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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