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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신은 또 렉시 톰슨을 외면했다

중앙일보 2021.06.08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렉시 톰슨(왼쪽)이 US여자오픈 우승자 유카 사소와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렉시 톰슨(왼쪽)이 US여자오픈 우승자 유카 사소와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어떤 대회는 승자가 아닌 패자를 통해서 기억된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7일(한국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올림픽 클럽 레이크 코스에서 막을 내린 US여자오픈은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번 대회 우승자는 유카 사소(19·필리핀)다. 사소는 하타오카 나사(일본)와 함께 합계 4언더파를 기록해 연장전을 치렀고, 3홀 연장에서 승리했다.
 

US여자오픈 마지막 날 대역전패
5타차까지 앞서다 막판에 무너져
과거 역전패와 아픈 가족사 소환
필리핀 19세 사소 연장전서 우승

마지막 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선두로 출발해 5타를 잃고 밀려난 렉시 톰슨(미국)의 쓸쓸한 표정일 것이다. 톰슨이 누구인가. 12살 때부터 이 대회에 출전한 골프 신동이었다. 26살 나이에, 이번이 15번째 US오픈 출전이다.
 
톰슨 마음에는 상처가 있다. 2017년 ANA 인스퍼레이션 최종라운드. 3타 차 선두를 달렸던 그는 전날 오소 플레이를 한 게 뒤늦게 알려져 4벌타를 받았고, 결국 역전패했다. 바로 그해 시즌 최종전에서는 마지막 홀의 짧은 퍼트를 놓쳐 ‘올해의 선수상’ 수상과 ‘세계 1위’ 기회를 날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머니의 별세와 어머니의 암 투병도 지켜봤다. 그래서 이듬해(2018년)에는 ‘정신적 휴식’을 위해 한 달간 모든 대회에 결장했다. 그중에는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 여자오픈도 포함됐다. 
 
톰슨은 15세 때 프로가 됐다. 프로는 승리의 영광을 얻기도 하지만 패배의 책임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 10대에 그 압박감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 집을 떠나 투어 생활을 하면 자존감을 제대로 키우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아픈 가족사도 있다. 그의 어머니는 사고로 남편을 잃었고, 2년 뒤 시동생과 재혼해 톰슨을 낳았다.
 
톰슨은 19세인 2014년 메이저대회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우승했지만 이후 발랄한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경기 중 불안해 보일 때가 많다. 특히 칩샷과 짧은 퍼트를 할 때 그렇다. 톰슨은 이번 대회에서 3라운드를 선두로 마친 뒤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성적에 너무 신경 썼다. 상담사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고백했다.
 
톰슨은 마지막 날 10대인 사소, 그리고 메가 가네(18·미국)와 함께 챔피언 조에서 경기했다. 아마추어인 가네는 첫 홀 더블보기, 두 번째 홀 보기로 무너졌다. 일본 투어 2승의 사소는 2, 3번 홀에서 연속 더블보기를 했다. 그 덕에 톰슨은 여유가 생겼다. 8홀을 남긴 10번 홀까지 5타 차 선두였다.
 
톰슨을 무너뜨린 건 11번 홀 페어웨이에서 나온 ‘뒤땅’이었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수가 이어졌고 더블보기를 했다. 이후 톰슨은 그린 근처에서는 웨지 대신 퍼터를 썼다. 아마도 ‘뒤땅’ 부담감 때문이었을 거다. 14번 홀에서 또 보기를 했다. 그래도 2타 차 선두였다. 16, 17번 홀은 연속 파 5홀이다. 장타자인 톰슨에게 유리했다. 톰슨은 16번 홀에서 파에 그쳤고, 가장 쉬운 17번 홀에서 보기를 했다. 1.2m 파 퍼트를 넣지 못했다. 박지은 해설위원은 “폴로 스루가 전혀 없는 자신 없는 스트로크”라고 분석했다.
 
톰슨은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했다. 결국 한 타 차로 연장전에 가지 못했다. 그는 2017년 시즌 최종전 바로 그 짧은 퍼트 실패 후 “골프는 아주 잔인한 게임”이라고 말했다. 이날은 허탈한 미소만 지은 채 말없이 그린을 떠났다.
 
사소는 필리핀 선수로는 첫 메이저 챔피언이다.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는 필리핀인이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여자 골프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휩쓸었다. 장타에 쇼트 게임 감각도 뛰어나다. 그는 “세계 1위가 꿈”이라고 말했다. 우승한 이 날이 19세 11개월 17일인 그는 2008년 박인비가 세운 대회 최연소 우승과 타이를 기록했다. 박인비는 고진영과 1오버파 공동 7위에 올랐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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