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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박차고 울릉도행…그를 찾아간 '할리 타는 여교수'

중앙일보 2021.06.06 05:00
 
울릉도에 다녀왔습니다.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연락선을 타고 가는 그 울릉도, 맞습니다. 연락선은 아니고 쾌속선이었지만 울렁거린 건 맞습니다. 가슴이 아니라, 속이 말이죠. 지난 2일, 저동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약 1시간을 산골로 들어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1박2일이라는 무리한 일정으로라도 꼭 뵙고 싶었던 분들. 이들입니다.  

팀장의 픽=전수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 타는 멋진 언니' 신계숙 교수와, 그가 강 넘고 바다 건너 만난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씨. 전수진 기자

'할리 타는 멋진 언니' 신계숙 교수와, 그가 강 넘고 바다 건너 만난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씨. 전수진 기자

 
왼쪽은 ‘할리 데이비슨 타는 멋진 언니’로 유명한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입니다. 오른쪽은 ‘울릉도 자연인’으로 유명한 정헌종 씨입니다. 원래는 신 교수만 인터뷰하려 했습니다. EBS ‘맛터사이클 다이어리’에 출연 중인 그가, 할리 데이비슨을 배에 태우고 동해를 건너 울릉도에 간다니,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어찌 들지 않겠습니까. 신 교수는 유재석 씨가 진행하는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도 ‘하고 싶은 일은 오늘 당장 한다!’는 테마로 ‘멋짐 뿜뿜’ 등의 자막과 함께 소개된 분이죠. 책 열 권은 쓸 수 있는 신 교수의 스토리는 다음 주, 중앙일보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팀장의 픽’은 신 교수가 찾아가 단번에 ‘아우’라고 부른 정헌종 자연인입니다.  
 
이 장면을 만나기까지 멀미 좀 세게 했습니다. 울릉도 해안도로에서 만난 일출 직후.  전수진 기자

이 장면을 만나기까지 멀미 좀 세게 했습니다. 울릉도 해안도로에서 만난 일출 직후. 전수진 기자

 
1970년생인 정헌종 씨는 원래, 평범한 대기업 사원이었다고 합니다. 포항 소재 대기업에서 잦은 야근에 지쳐가던 평범한 30대 초반 청년이었던 그가, 어느 날 중대 결심을 합니다. “자유가 필요하다.” 모든 걸 훌훌 털고 물색을 하다 울릉도가 눈에 들어왔다고 해요. 포항에서 살다 보니 울릉도가 가깝게 느껴졌던 것도 있을 겁니다. 포항에선 매일 울릉도로 여객선이 출항하니까요. 울릉도 중에서도 산골짜기에, 몇 년 동안을 매물로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 땅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사 약 25도의 오르막을 더 올라가야 하는 (게다가 미끄러운 곳이 있어서 저는 심지어 넘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거친 곳이었죠. 여기에서 그는 운명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람도 인연이듯, 땅도 인연이지요.” 그의 말입니다.  

 
이곳입니다.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씨의 보금자리. 여기에 앉아 명이죽도 해먹고, 시도 씁니다. 전수진 기자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씨의 보금자리. 여기에 앉아 명이죽도 해먹고, 시도 씁니다. 전수진 기자

 
화산섬 울릉도의 특성상, 배수가 잘되고 뱀이 살지 못하는 땅이라고 하네요. 대신 울릉도 특산품인 명이나물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매년 봄 명이나물 재배해서 직접 담근 장아찌만으로도 1년 한 해 풍족히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뒤켠엔 닭장도 있고요. 그야말로 자유 방임 시스템입니다. 닭장에 문이 없어요. 신 교수와 제가 갔던 그 날도 암탉들은 모두 출타(?)중이었습니다. 수탉 2마리만 어슬렁거리고 있더군요. 대신 암탉들이 낳아놓은 계란들이 무려 이렇게!  
 
정헌종씨가 키우는 닭들이 낳아준 달걀. 그야말로 방사란입니다. 전수진 기자

정헌종씨가 키우는 닭들이 낳아준 달걀. 그야말로 방사란입니다. 전수진 기자

 
이 정도 되면 우린 궁금해지죠. 가족은? 
대신 물어봤습니다. 
3남 3녀 중 넷째인 그는 혼자라고 합니다. 처음엔 어머니도 그가 이렇게 사는 걸 반대하셨지만, 지금은 오히려 격려해주신다고 하는군요. 모든 중년남성의 로망 프로그램이죠, ‘나는 자연인이다’에 그가 나와서, 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가 홀로 살면서 자아를 찾고,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찾았기 때문이지요. 시집도 출판했습니다. 
 
“시 좀 더 많이 써봐라”는 어머니의 애정이 어린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뿌듯하다고 합니다. 산에서 살다 보니 각종 약초 박사가 다 됐고, 한약재이기도 한 마가목 나무의 꽃을 말려서 직접 차를 우려내는 ‘맛의 달인’도 됐습니다. 그는 쑥스럽게 말합니다. “풀에도 별종이 있듯, 사람도 별종이 있죠. 산에 들어오니 제가 별종이 된 거 같더라고요.”
   
정헌종씨가 멋지게 지은 집의 서가. 약초 관련 책이 빼곡합니다. 전수진 기자

정헌종씨가 멋지게 지은 집의 서가. 약초 관련 책이 빼곡합니다. 전수진 기자

 
하지만 그의 시를 읽어보니, 쓸쓸한 느낌이 들더군요. 들어보시겠어요? 혹시 영상 재생이 어려우시면, 아래 텍스트를 보시면 됩니다.  
 
제목: 해후 
 
정헌종  
 
(전략) 나는 취하고 싶은 때가 있다. 타향에 와 타향 같은 내 땅까지의 거리. 오늘은 잊기로 한다. 내가 없어 해코지가 있는 땅. 그 코미다가 웃긴 얘기다만 염소야. 섬은 너희들 뿔처럼 정있는 것은 아니더라. 그러나 다 정도 버리고 외로운 섬. 오늘은 나도 별이나 먼저치럼 나를 위해 몸부림하며 기도한다. 나는 없고 내가 없으면 나는 행복하겠다. 
 
한 작품 더 보실까요.  
 
제목: 사랑이 알게 했다는 것을 
 
나는 산으로 가는 줄 알았다. 
위대하거나 화려하거나 
만년설이 가득한
신비한 곳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고
오를만한 곳이면 발 끝에 밟히는 나뭇가지나 
말라붙은 산야초같은 삶도 좋았다 
언젠가는 계절같이 새롭다는 사실과 
어두웠으니 보이지 않았으니
내리막 길도 무겁다는 사실과
등에 배인 무게와 마음의 짐들은
중력과 상관없다는 사실도
희망이나 기쁨까지도 아는 줄 알았다
산산히 부서지고서 알았다
사랑이 알게 했다는 것을
절망까지도 알게 했다는 것을.  
 
자작시를 읊는 정헌종 씨. 전수진 기자

자작시를 읊는 정헌종 씨. 전수진 기자

우린 모두 자연인을 꿈꾸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곁에 있는 누군가를 소중히 대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자연인 정헌종 씨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번 주말에도 누군가에게 따스한 사람이 되어주시길,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정헌종 자연인의 말처럼, 사랑은 우리를 알게 하니까요.  
 
전수진 투데이&피플 뉴스팀장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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