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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형식 종합판 ‘이건희 컬렉션’…미술계 “국립근대미술관 만들어야”

중앙일보 2021.06.05 06:00
자치단체간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기증한 미술품을 별도로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다. 
 
기증품 중엔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국보·보물급이 다수 포함된 만큼, 지자체는 미술관 유치가 지역 경쟁력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미술계는 제작 연대나 형식이 다양한 만큼, 작품 각각을 적합한 장소에 보관·전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자체, '이건희 미술관' 유치 총력전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기증품 중 하나인 이중섭의 〈황소〉 [문화체육관광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기증품 중 하나인 이중섭의 〈황소〉 [문화체육관광부]

4일까지 파주·과천·대구·부산·용인을 포함해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에 뛰어든 지자체는 약 20곳에 이른다. 가장 먼저 의사를 밝힌 건 부산시. 박형준 시장은 지난달 2일 페이스북에 “부산 북항 등 새로운 문화 메카에 세계적인 미술관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며 “문화ㆍ관광산업의 연계를 위해서도 이건희 미술관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지난 3일 문화체육관광부에 공문을 보내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공모 형식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대부분 지자체는 ‘균형발전 차원에서 이건희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영·호남 9개 시장·군수 모임인 남해안남중권발전협의회는 지난 2일 하동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며 “정부가 지방 문화 황폐화를 방치하는 건 지방의 생명력을 잃게 하는 요인이다. 남해안남중권 지역에 이건희 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협의회엔 진주·사천·남해·하동·순천·여수·광양·고흥·보성 등이 참여하고 있다. 권영진 대구 시장은 건축비와 부지비 등 총 3100억원을 전액 시 예산으로 지원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진주·과천·의령, ‘접근성·인연설’ 강조

이건희미술관 대구유치 시민추진단이 지난달 26일 오전 대구시의회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건희 미술관 수도권 건립 고려'를 시사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뉴시스]

이건희미술관 대구유치 시민추진단이 지난달 26일 오전 대구시의회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건희 미술관 수도권 건립 고려'를 시사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뉴시스]

다른 문화·예술 공간과 연계를 강조한 지자체도 있다. 김종천 과천시장은 지난 2일 김부겸 국무총리를 만나 “과천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과천과학관, 추사박물관 등 품격있는 문화시설이 자리 잡고 있는 데다, 교통 접근성도 좋다”며 정부 과천청사 앞 유휴지에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건의했다. 
 
서울은 종로구 송현동 부지 역시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공예박물관, 인사동 전통문화 거리 등과 인접해 '도심 문화 벨트'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경남도의회는 고 이병철 명예회장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도의회는 지난 3일 정례회에서 이건희 미술관 경남 설립을 촉구하기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면서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가 이병철 회장의 모교인 점, 1936년 첫 사업으로 시작한 협동 정미소가 마산에서 태동한 점을 강조했다. 의령군은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정곡면에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미술계, “작품 주제·시대·맥락 고려해야”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문화체육관광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문화체육관광부]

 
그러나 미술계에선 성격도 연대도 다른 유물과 작품을 한데 모으는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도자기, 서화, 회화, 청동기 시대 유물 등은 보관·전시 방법이 각각 다른 데다 동시대 작품과의 맥락도 고려해 전시해야 한다는 취지다. 미술계 인사 400여명이 참여한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이 회장 기증품 중 근대기 작품 1000여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근대 미술품 2000여점을 합해 국립근대미술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진국은 고대·중세-근대-현대-동시대 등 4관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한국은 국립중앙박물관(고대·중세)과 국립현대미술관(근대·현대) 등 2관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게 미술관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주요 근거다. 프랑스엔 오르세, 영국엔 테이트 브리튼, 일본엔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프랑스의 근대미술관에 해당하는 오르세 미술관. [중앙포토]

프랑스의 근대미술관에 해당하는 오르세 미술관. [중앙포토]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지난달 27일 모임 발족식에서 “단순히 기증품 수천 점을 한꺼번에 보기보다 주제, 시대별 기존 작품과 섞여 스토리텔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립근대미술관을 만든 후 대전·부산·전북도 등 공립미술관 순회 전시를 통해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다만 “미술품을 진찰하는 '컨서베이터'가 지방 미술관에 없는 데다 항온·항습·적외선 차단 등 기본적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며 지방 미술관 역량을 끌어올릴 것도 주문했다.
 
한편 이 회장의 기증품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고려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이중섭의 '황소'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등이 포함됐다. 기증품의 감정가는 3조원 정도지만 시가는 10조원을 넘을 수도 있다는 게 미술계 판단이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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