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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 장영희 “한 번 갔다 온 조영남과 사귀는 건 억울”

중앙선데이 2021.06.05 00:20 739호 16면 지면보기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5〉 세상 뜬 ‘여사친’

생전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를 위해 조영남씨가 2005년 열어준 생일 파티 장면. 왼쪽부터 화가 김점선, 장 교수,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생전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를 위해 조영남씨가 2005년 열어준 생일 파티 장면. 왼쪽부터 화가 김점선, 장 교수,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시작은 피카소였다. 나는 세계 최고의 화가 피카소가 젊은 시절 유독 시인들과 돈독한 교우관계를 맺은 걸 부러워하면서 나도 피카소에 못지않다며 우리 쪽 시인들, 강은교 김초혜 마종기 김지하 이제하 김민기 등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런데 나는 지난주 내내 그 유명한 서강대의 영문학 교수였던 장영희의 이름을 빼먹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차라리 잘 됐다. 이제 정식으로 장영희 얘기만 잔뜩 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영시 소개 장 교수 칼럼에 열광
TV 토크쇼 출연 이후 가까워져
헤이리서 생일 축하 노래 선물

행복전도사 최윤희, 화가 김점선
함께한 짝패 멤버 아픔 눈치 못채
세 사람 모두 이 풍진 세상 떠나

십 오륙 년 전쯤으로 돌아간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일간지에 매주 쓰는 장영희 칼럼에 강한 눈길을 주게 되었다. 매주 한 편씩 영시를 소개하는 칼럼인데 나는 영시보다 짧고 강렬한 그녀의 코멘트에 열광하곤 했다. 무엇보다 칼럼 구석에 실린 그녀의 얼굴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러다가 나는 KBS의 토크쇼 ‘조영남이 만난 사람들’의 진행을 맡게 되고, 나는 못 말리는 광팬의 심경으로 장영희의 TV 출연을 요청했고 흔쾌히 그녀가 받아들였다.
 
약속한 날 나는 방송 카메라 4대를 대동, 강의실에 직접 들어가 2시간짜리 강의를 방청하고 인터뷰를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 쪽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녀는 야심 찬 궁리를 했다고 한다.
 
‘그래 내가 거기 출연해주고 조영남씨더러 우리 아버지 10주기 추모식 때 특별 노래를 청하면 들어줄지도 몰라.’
 
그녀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되었다.
 
장영희 선친은 장왕록 서울대 영문과 교수
 
추모식 장소인 서강대 소강당 입구에는 부녀의 이름이 적힌 책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장영희의 아버지는 장왕록. 내가 무슨 성경책이나 되는 것처럼 한때 머리맡에 놓고 읽었던 소설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와 대담을 한 사람이 장왕록 아니던가. 세상에! 이럴 수가! 이름이 꼭 중국 이름 같다고 여겼던 서울대 영문과 장왕록 교수가 바로 장영희의 아버지라니!
 
나는 그날 추모 노래로 ‘오! 마이 파파’ 등 몇 곡을 불렀다.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상호 고맙다는 의미의 한두 차례 저녁 식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는 우리들의 공동 짝패 멤버였던 행복전도사 최윤희, 화가 김점선, 시 쓰는 수녀 이해인, 여기자 이나리 박선이가 꼭 끼었다.
 
행복전도사였던 최윤희씨. [중앙포토]

행복전도사였던 최윤희씨. [중앙포토]

그렇게 잘 나가다가 2005년에 쓴 책 『맞아죽을 각오로 쓴 100년만의 친일선언』이 화를 불렀다. 한국 사람들이 ‘친일’을 무조건 ‘매국노’로 생각하는 건 너무 과격하다는 뜻이었다. 이 책이 일본에서 유명한 고단샤라는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일본에 건너가 여러 매체와 인터뷰한 것 중에 하필 산케이 신문사에 내가 마치 일본을 두둔하는 것처럼 내용이 잘못 실린다. 나는 하루아침에 이완용 동생으로 여겨져 책 제목처럼 국내 여론에 맞아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미술 대작 사건으로 5년 유배 생활 훨씬 전에 나는 이미 2년의 유배 생활을 치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광역 지자체장, 대기업 총수 등이 연달아 유명을 달리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아! 다음은 내 차례구나 하고 자포자기 백수생활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한 뭉치의 소포가 날라왔다. 보낸 사람 이름이 바로 장영희였다. 용기를 잃지 말라는 예쁜 손편지와 몇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나는 즉시 전화를 해서 최윤희 김점선과 함께 저녁 약속을 이틀 뒤로 잡았다. 내가 받은 몇 권의 책 중에 예의 차원에서라도 한 권쯤 읽어야 한다고 골라잡은 것이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중앙SUNDAY의 젊은 구독자들이여! 빨리 늙어 보시라. 나처럼 빨리 70대 영감이 되어 보시라. 희한하게도 옛날에 읽었던 그저 그런 책들이 훨씬 재밌고 중요하게 읽힌다. 옛날에 읽었을 때는 더럽게 재미없는 책, 이걸 왜 미국 영문학의 대표 소설이라 하나(나는 당초에 픽션이나 소설은 영 취향이 아니었다) 싶었던 책이 늙어서 읽으니까 아! 이런 거였구나, 좋은 내용이었구나, 아! 그래서 장영희가 이걸 번역해 놨구나, 내막을 알게 됐다는 얘기다.
 
약속 날 나는 약속장소였던 신촌 이대 뒷문 건너편에 있던 카페 프로방스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우리 고정 멤버인 최윤희 김점선 그리고 예의 똘망똘망한 눈빛의 장영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앗! 그리고 테이블 위의 생일 케이크. 와! 나의 얼굴 사진이 케이크 위에 붙어 있었다. 케이크 위엔 ‘60회 생일을 축하하며’라는 글귀와 함께 말이다.
 
내 생일은 이미 지난 4월이고 지금은 8월 초인데 뒤늦은 생일잔치다. 전부 장영희의 깊은 배려심의 결과였다. 나는 너무 기분이 째져, 장영희! 돌아오는 생일에는 내가 오직 장영희 당신만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줄게! 화답의 멘트를 날렸다. 그녀의 생일은 9월이라 금방 다가왔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문학도시 헤이리에 그랜드 피아노와 완벽한 오디오 시스템을 구비한 레스토랑 소유자 황인용 선배에게 장소를 허락받고 유명 PD 출신인 주철환에게 즉흥 쇼의 연출을 시키고, 진행과 홍보 담당에 기자 조우석을 준비시켰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다. 일종의 짝사랑 프러포즈였던 거다. 지금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때 내가 “야! 장영희 나 널 좋아해” 한 번쯤은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한 이유가 있다. 내 측근 중에 누군가가 장영희를 좋아하는 남자가 꽤 된다고 귀띔해준 것이다. 그런 가짜 뉴스를 유출한 인간을 색출했어야 하는데 유효 기간이 지난 것 같아 그냥 흐지부지 된 게 못내 아쉽다. 하다못해 여동생으로라도 규정해 놓았어야 한다. 내 아버지 조승초씨가 형제들 중 막내라 나는 일가친척 중에 남동생만 딱 하나만 있고 여동생이 지금껏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여동생이라는 칭호가 평생 정겹게 여겨졌다. 장영희를 위한 특별 생일 쇼는 PD 주철환의 멘트로 멋지게 시작되었다. 주철환이 막을 열고 대회를 선언한 다음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오늘의 주인공 장영희한테 먼저 주었다. 예의 명쾌하게 부서질 듯한 음성과 함께 이런 식으로 답사를 한 것 같다.
 
“헤이리 콘서트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자 저희 학교에선 난리법석도 아니었어요.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 오고 학생들이 물어오고 이메일이 날라왔습니다. ‘조영남과 보통 관계가 아니라던데 사실이냐.’ 그래서 제가 일일이 말해 줬습니다. ‘얘들아! 그런 소리 말아라. 나같이 깨끗한 사람이 조영남 같은 한 번 갔다 온 사람과 사귀는 건 너무 억울한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날 나는 장장 한 시간 반짜리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물론 거기 모인 관객들에겐 오늘의 특별 음악회에 관한 내막을 주철환 PD가 잘 전달해 주어 음악회 분위기는 최상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그날 관객 중엔 출판사 한길사 대표 김언호 사장 부부가 참석했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뒤풀이 시간에 김 사장님이 인사차(나는 그렇게 믿었다) “영남씨! 우리 출판사에서 책 한 권 써보시죠” 한 걸 철석같이 믿고 나는 두 권의 책을 연달아 냈다. 한 권은 『어느 날 사랑이』라는 제목의 내 사랑 이야기를 쓴 책이고 또 한 권은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다. 미술책 제목을, 싱겁게 웃기는 전유성과 얘기하다가 “형! 현대인은 현대미술을 못 알아먹잖아” 하고 투덜대는 걸 그대로 받아 제목을 썼는데 책 내용보다 제목이 훨씬 그럴듯한 것 같았다.
 
생일 콘서트엔 행복전도사 최윤희를 비롯, 말(馬)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김점선이 장영희와 시종 함께했다. 김점선과 나 사이엔 ‘우리는 그림을 그린다. 전공은 아닌데 그래도 그림을 그린다’는 공통점이 있어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었다. 김점선은 막판에 화투를 소재로 하는 그림을 그렸다. 왜 갑자기 화투 그림을 그리느냐 물었더니 컴퓨터에 손을 얹는 게 힘들어서 영남씨처럼 그리기 쉬운 화투를 그린다고 대답했다. 아! 이 맹갈이 같은 시키! 내 자신한테 하는 푸념이다. 그때 나는 몰랐다. 내 동료 친구 장영희의 단짝 김점선이 바로 암 투병 중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이 말을 독자 제위께서 믿어주실까! 맹세코 그때 나는 김점선이 암 투병 중이라는 걸 상상도 못했다.
 
생일 축하 콘서트, 일종의 짝사랑 프러포즈
 
지금도 얼핏얼핏 기억나는 게 있는데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라는 책 얘기를 둘이서 재밌게 주고받아서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부리나케 책을 사 들고 와 읽었는데 두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이게 글인지 넋두리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이상하고 어색했다. 그런데 장영희와 김점선은 어느 부분의 어느 장면을 얘기하며 감탄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그때 나는 아하! 저자들은 내가 범접하지 못하는 문학의 딴 세상에 들어가 있구나. 그러면서 둘이(사실은 옆에 나도 있었는데) 어쩌고저쩌고 무슨 수치가 모자라서 주사를 못 맞았다는 식의 얘기를 너무 즐겁고 유쾌한 톤으로 했기 때문에 털어놓고 말하지만, 그때도 그게 항암 주사라는 걸 꿈에도 인지하질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왜 나랑 특히 가까운 최윤희도 시종 옆에 있었는데 왜 그런 언질을 안 주었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요는 내가 워낙 이기적이라서 남의 아픔에 그다지 신경을 안 쓴 것도 같다. 하기야 내가 신경을 쓴다고 뭐 달라질 것이 있으랴만 말이다. 딱한 건 그때의 정황이 너무도 궁금한데 지금 전화를 해서 물어볼 수도 없게 생겼다. 내 휴대폰에는 최윤희의 전화번호가 아직도 살아 있다. 김점선한테도 물어볼 수가 없고 물론 장영희한테도 물어볼 수가 없다. 누가 믿겠는가. 그들은 모두가 일찌감치 이 풍진 세상을 떴다. 기록에 의하면 김점선이 지금부터 12년 전인 2009년 죽었고 두 달 후 장영희가 죽었고 최윤희도 뒤늦게 눈을 감았다.
 
장영희의 생일은 9월이다. 내가 어느 핸가 물었다. “어이 장영희! 금년에도 내가 생일잔치 해줄 용의가 있는데 어때” 물었는데 가타부타 소식도 없이 그해 9월을 넘겼다. 나중에 김점선한테 전해 들은 얘긴데 그해 생일은 윤여정과 함께 보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됐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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