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정호의 직격인터뷰] 제도 혁신 없는 4차 산업혁명 추진, 실패한 양무운동 된다

중앙일보 2021.06.04 00:42 종합 26면 지면보기
정보산업혁명의 성공 비결 제시한 김태유 교수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26일 ″4차 산업혁명이란 시대적 흐름의 선두 주자가 되면 경제의 가속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26일 ″4차 산업혁명이란 시대적 흐름의 선두 주자가 되면 경제의 가속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남정호 칼럼니스트

남정호 칼럼니스트

무릇 나라의 중흥을 도모하려면 종합적인 진단과 대책이 필요하다. 국가의 쇠퇴란 한 가지 문제에서 비롯되지 않는 탓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헤매고 있다는 걱정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런 혼돈 속에서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가 나라의 방향을 제시하는 묵직한 책 『한국의 시간』(샘앤파커스)을 냈다. 동서양의 정치·경제는 물론 과학과 역사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중흥의 열쇠를 찾아온 통섭의 학자로부터 지난달 26일 지혜 어린 대책을 들었다.   

한국, 경제성장 정체로 가속성 잃어
'은하수의 시대'에선 잘 할 일을 해야
순환보직제 없애야 전문성 증가
북극항로 열리는게 기회이자 희망


 
한국이 가속 사회에서 감속사회로 떨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는데.
"농업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생산이 체감하면서 경제 성장이 줄어든다. 이런 사회를 감속사회라고 한다. 반면 산업사회는 갈수록 경제 성장이 빨리지는 가속사회다. 농업사회 같은 감속사회에서는 추가적인 노력에 대한 보상이 줄어들지만 가속사회에서는 보상이 커지는, 즉 인센티브가 있는 사회다. 두 사회에서는 인간성 자체가 달라진다. 구한말 한국을 여행했던 영국의 지리학자 엘리자베스 버드 비숍은 한국인을 느리고 게으르고 부정확하다고 썼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빠르고 부지런하고 정확하다. 인센티브가 인간성을 바꾼 것이다. 극빈국 조선이 부강한 한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 한국 사회가 지금 가속성을 잃어가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한국의 성공 비결은.
"기존의 설명으로 만족할 수 없어 스스로 연구한 끝에 세 가지 이유를 찾았다. 첫째는 ‘수출주도 산업화’다. 다른 후발 개도국들은 대부분 수입대체 산업화를 하다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는 흑백 TV도 못 만드는 나라가 컬러 TV를 만들어 수출하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한산모시, 강화도 화문석 밖에 경쟁력 있는 상품이 없던 나라가 갑자기 TV·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로 바꾸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전략이 결국 성공한 것이다. 둘째는 원가 이하로 외국에 물건을 파는 ‘적자 수출’ 전략이었다. 장기적으로 적자 수출을 계속하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가 원가 1000달러짜리 상품을 900달러에 수출하면 국내에서 1200달러에 팔 수 있게 해줬다. 수출에서 100달러 손해 보더라도 국내에서 200달러를 남겨 결국 100달러의 이익을 맞춰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질 좋은 외국상품이 국내시장에 들어오면 안 되니 수입 금지 및 고율의 관세로 이를 막았다. 적자 수출을 통해서라도 외환을 확보하고 이 돈을 산업자본으로 기술개발에 투입함으로써 경제개발을 이뤄낸 것이다. 끝으로 놀랍게도 ‘최저가 낙찰제’가 한몫했다. 문명 발전사를 보면 근대경제를 먼저 이룬 선진국들은 죄다 물류비용이 쌌다. 유럽 주요 하천의 하류에 위치한 네덜란드는 수로가 잘 발달해 있었으며 영국 역시 수로와 함께 구릉지대라 도로와 철도를 쉽게 놓을 수 있었다. 미국도 미시시피강 지류를 따라 물류 유통이 원활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은 악산이 많아 물류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 문제를 최저낙찰제라는 제도를 통해 극복했다. 주어진 조건하에 가장 싼 가격에 도로·교량 등 인프라를 조성함으로써 수출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도 순기능으로 작용했다고 했는데.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주역 중 하나가 건설업이다. 건설업은 같은 장비, 같은 인력을 동원해 얼마나 빨리 건설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공기가 늦어지면 비용이 폭증하지만, 줄이면 큰 이익을 본다. 빨리해낼 수 있다는 우리 장점이 건설업뿐 아니라 조선·자동차 등 한국 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태유, 김연배 지음

김태유, 김연배 지음

김 교수는 '최저가 입찰제','빨리빨리 문화'처럼 한국 사회의 병폐로도 지적돼온 사안들이 오히려 우리의 장점이라는 기발한 역발상을 제시한다. 그 덕에 한국이 다른 개도국과는 달리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르렀으며 한국인의 인성마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지금 큰 위기에 봉착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인간에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행복이고, 오늘보다 못한 내일은 불행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작 전에 이미 젊은이들은 3포, 7포 세대 하면서 연애·결혼·출산으로부터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고 했다. 이는 경제 성장이 정체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1위다. 앞으로 고령화는 계속 진행되어 부양 대상 노인은 늘어만 가는데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니 이들을 도와줄 돈이 없다. 그 심각성을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잊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우리는 과거의 헬조선보다 훨씬 더 악화된 냉엄한 현실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실업이 증가하고 또 소상공인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책은 뭔가.
"산유국 경제는 유가가 떨어지면 나빠지지만, 다시 오르면 부활한다. 하지만 한국처럼 모든 것을 오직 땀으로 만들고 기술로 해결해온 나라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다행이라면 지금 4차 산업혁명이란 대변혁기가 찾아와 이 시대적 흐름의 선두 주자가 되면 비약적 성장으로 경제의 가속성을 되찾을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이 뭔가.
"가속하는 산업사회가 더 빨리 가속하는 지식산업사회로 바뀌는 것이다. 산업사회는 제조업 사회로 아톰 인더스트리, 즉 물질산업의 사회다. 반면 지식산업사회는 아톰 인더스트리에 비트 인더스트리가 추가됨으로써 효율성이 증가하고 또 전혀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과 바이오산업 등이 공존하는 사회다."  
현재 한국은 4차 산업혁명의 어느 단계에 와있나.
"과거 서구의 산업화 물결이 동양으로 밀려오자 청나라는 중국의 몸체는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과학기술만 받아들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양무운동을 했지만 실패했다. 반면 일본은 혼만 남기고 다 바꾸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정신에 따라 과학기술과 함께 국가제도를 혁신해 성공했다. 현재 한국은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면서 제도 혁신 없이 AI·인공지능 같은 것만 하려고 한다. 마치 실패한 중국의 양무운동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잎새나 가지만 볼 뿐, 숲을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4차 산업혁명을 하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
중진국 함정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뭘까.
"과거에는 선진국들이 했던 섬유·철강·전기·화학 등 기간산업을 열심히 따라 하면 성공했다. 옛날 항해사들이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잡지 않나. 그래서 나는 이 기간을 '북극성의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은하수의 시대'로 ICT·바이오 등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산업이 생성되고 소멸한다. 기간산업이 없는 시대에서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산업을 선택해야 성공한다."
구체적 혁신 방안이 있나.
"첫째, 규제 완화를 위한 정부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관료가 있어야 하며 이런 공무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순환보직제를 없애야 한다. 순환보직은 '무능한 만능 공무원'만 양산할 뿐이다. 둘째, 젊었을 때는 유동지능이 높고, 나이 들면 결정지능이 상승한다. 유동지능은 주로 수리력, 계산력, 추리력, 그리고 패션 감각, 디자인 능력 등에 영향을 준다. 반면 결정기능은 이해력, 판단력, 인내력과 관련돼 있다. 따라서 유동지능이 높은 젊은 사람은 4차 산업혁명 분야로 보내고 결정 지능이 높은 연령층은 일반 관리나 행정 쪽에서 일하게 하면 된다. 이것이 은퇴가 없는 '이모작 사회'다. 끝으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호두껍질 속에 갇힌 것 같다. 북쪽은 중국대륙, 남쪽은 일본의 영해가 오키나와까지 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러시아 연해주가 우리가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활로이자 희망이다. 러시아는, 인구 14억의 중국이나 북방섬 영토 분쟁중인 일본이 들어오는 것을 몹시 경계한다. 하지만 러시아에 위협이 안 되는 한국을 내심 환영한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과거 주요 문명을 반영시킨 실크로드, 향신료 루트, 대서양 루트 등 인류의 큰길에 접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로 새로 열리게 된 북극항로는 반드시 대한해협을 거쳐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인류문명을 선도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그러니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 김태유 교수=노무현 정부 시절 초대 정보과학기술 수석보좌관으로 발탁된 뒤 과학기술 부총리 신설을 제안해 성사시키는 등 한국을 과학기술 중심사회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 후 국가발전이란 화두를 놓고 4차 산업혁명 연구에 천착해왔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콜로라도 CSM대에서 자원경제학 박사가 됐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