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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 차올라도 아내 생각…진주만 사랑, 80년 만에 완결됐다

중앙일보 2021.06.03 16:16
윌리엄 유진 블랜차드, 진주만 공습 당시 모습. 사진 트위터 캡처(좌), AP=연합뉴스

윌리엄 유진 블랜차드, 진주만 공습 당시 모습. 사진 트위터 캡처(좌), AP=연합뉴스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과 아기가 더 보고 싶어져. 이제 5개월 10일 남았네. 나만큼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 또 있을까?"
 
1941년 11월 29일. 전함 USS 오클라호마 승조원 윌리엄 유진 블랜차드는 펜을 들었다. 그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향한 그리움을 잔뜩 담아 편지를 써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진주만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그로부터 8일 뒤 일본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됐다. 일본군의 뇌격기는 특수 제작된 어뢰를 오클라호마를 향해 쐈다. 수발의 어뢰가 물을 갈랐다.
 
어뢰는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배는 갈가리 찢어졌다. 오클라호마함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블랜차드를 포함한 429명의 승조원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블랜차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2021년 6월 7일. 블랜차드는 80년 만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진주만 공습으로 전사한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오클라호마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블랜차드가 편지에서 언급한 아기는 80세가 됐다. 수신인인 아내는 2007년 세상을 떠났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정박 중 일본군 공습으로 불탄 채 침몰하는 미 전함 애리조나함의 모습. 로이터=뉴스1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정박 중 일본군 공습으로 불탄 채 침몰하는 미 전함 애리조나함의 모습. 로이터=뉴스1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일간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듀션은 오클라호마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알리면서 블랜차드의 사연을 전했다.
 
1918년 태어난 블랜차드는 16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3년 동안 대장간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에 미 해군에 입대해 오클라호마함의 보일러병이 됐다.  
 
블랜차드는 오클라호마함이 진주만에 정박하기에 앞서 정비를 위해 들린 워싱턴주(州) 브레머튼에서 4살 어린 로라 앤 라가사를 만났다. 갈색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940년 6월 17일 네바다에서 결혼했다.
 
부부의 만남은 짧았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부부는 영원히 이별해야 했다.
 
블랜차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생각했다. 오클라호마함 생존자인 제임스 사울은 1987년 블랜차드의 아내인 로라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9개의 어뢰를 맞은 전함은 빠르게 뒤집어졌다. 나와 12명의 승조원은 함선 아래에 갇혔다. 물은 서서히 차올랐다. 당시 블랜차드의 모든 생각은 당신과 아들뿐이었다. 그는 '내가 없으면 아내와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울은 물에 잠긴 창문을 4번의 시도 끝에 열었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는 당시 창문을 통해 블랜차드가 탈출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진주만 공습 당시 침몰했던 오클라호마호의 잔해 모습. 중앙포토

진주만 공습 당시 침몰했던 오클라호마호의 잔해 모습. 중앙포토

 
블랜차드를 포함한 전사자들의 유해는 침몰 18개월 만에 수습됐다. 바닷물 속에 있었던 유해는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게 훼손됐다. 당시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35구뿐이었다.  
 
진주만 공습 생존자들은 계속 유해에 대한 신원 확인을 요구했다. 미 당국은 2015년 법의학 기술 발전 등으로 신원 확인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388명의 신원을 확인하는 '오클라호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6년 동안 338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블랜차드도 그중 한 명이다.  
 
아들 빌 블랜차드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항상 삶에서 존재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주들에게 '너희 할아버지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는 걸 좋아했었다'고 회상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클라호마함에서 온 편지를 갈색 초콜릿 상자에 보관했고 블랜차드의 사진과 전사통보서를 액자에 담아 걸어놨다고 한다.
 
블랜차드는 오는 7일 아들이 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州)에 잠들 예정이다. 80년 만에 가족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미군 신문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는 "올해 연말까지 오클라호마 프로젝트의 작업이 끝날 것으로 예상되며 유해 중 90%가 확인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주(州) 진주만에 정박한 미 함대를 공습한 사건이다. 6척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 360여대가 공격을 가했다. 공습으로 미군 2,403명이 숨지고 4척의 전함 등이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 참전했다.
 
김천 기자 kim.ch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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