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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미군 600명이 중공군 4000명 물리친 기적의 가평 전투
백성호의 현문우답

미군 600명이 중공군 4000명 물리친 기적의 가평 전투

중앙일보 2021.06.03 00:35 종합 25면 지면보기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70년 전, 5월 26일 밤이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에서는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 포병부대 600명이 중공군 4000명을 상대로 밤을 새우며 싸웠다. 그리고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70년 만에 사람들이 모였다.  
 
가평 전투 기념비가 있는 곳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고 적힌 바위의 글귀가 있다. 미군 병사의 동상이 이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

가평 전투 기념비가 있는 곳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고 적힌 바위의 글귀가 있다. 미군 병사의 동상이 이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가평군 북면 이곡리 카이저길 45-23. 각별한 행사가 열렸다. ‘미국 한국전쟁 참전 및 가평 전투 70주년 기념식’이다. 1951년 5월 26일 가평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인과 미국인 99명이 5월 26일에 모였다. 참석자는 상당수 한국전 참전용사의 후손이었다. 양측은 애국가와 미국 국가를 번갈아가며 함께 불렀다. 
 
부인과 함께 이곳을 찾은 브래드 테일러(전 하겐다즈 부사장)도 한국전 참전용사의 후손이다. 미국 유타주 출신인 그는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몰랐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며 “그들의 희생이 거름이 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가 됐다.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가평 전투는 오랫동안 ‘잊힌 전투’였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 최승성 회장이 사유지 3300㎡(1000평)를 내놓고 참전 기념비도 세웠다. 가평 전투에 참전한 미군 포병대대원들이 모두 유타주 출신의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회원이란 사실은 최근에 테일러 씨의 조사로 처음 밝혀졌다.   
 
브래드 테일러(전 하겐다즈 부사장) 씨는 가평 전투에 참전한 미군 용사의 후손이다. 그는 가평 전투의 역사를 조사하다가 213포병대 대원들이 유타주 출신이며, 모두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회원이란 사실도 찾아냈다.

브래드 테일러(전 하겐다즈 부사장) 씨는 가평 전투에 참전한 미군 용사의 후손이다. 그는 가평 전투의 역사를 조사하다가 213포병대 대원들이 유타주 출신이며, 모두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회원이란 사실도 찾아냈다.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 최승성 회장은 사유지 1000평을 내놓으며 가평 전투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기념비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전투 현장에서 최 회장이 중공군의 공격 방향과 미군의 포격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 최승성 회장은 사유지 1000평을 내놓으며 가평 전투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기념비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전투 현장에서 최 회장이 중공군의 공격 방향과 미군의 포격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행사장을 찾은 국민의힘 최춘식 국회의원(가평)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주력 공격은 문산-서울, 조력 공격은 횡성-원주-춘천-이천을 통해 서울을 향했다”며 “가평은 북한의 조력 공격을 막는 중요한 저지선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적의 가평 전투
 
처음 목적지는 한국이 아니라 독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유럽의 독일에 미군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 포병 대대가 배치될 예정이었다. 독일에 있던 다른 포병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느라 빈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부대 배치 전에 실시한 전투력 테스트에서 213 포병대대는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결국 실전 배치 결정이 났고, 이들은 당초 계획과 달리 전쟁이 발발한 한국으로 향했다.  
 
가평 전투를 치렀던 미군 213야전포병대대 병사들. 대부분 20대 안팎의 젊은 나이였다. [사진 한국헬핑핸즈]

가평 전투를 치렀던 미군 213야전포병대대 병사들. 대부분 20대 안팎의 젊은 나이였다. [사진 한국헬핑핸즈]

 
213 대대원들은 미국 유타주 출신이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회원이었다. 직업 군인도 아니었다. 교사와 농부, 대학생과 탄광 노동자 등으로 주 방위군에 자원한 이들이었다. 고교 졸업 후 친구들과 함께 입대한 이들도 있었다. 대대원은 대부분 스무 살 전후의 파릇한 나이였다.  
 
한국전쟁에 투입된 이들은 1951년 5월 26일 이른바 ‘기적의 가평 전투’를 치렀다.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남유타 주립대학에서는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다. 미국 지상파 공영방송 PBS에서도 다룬 바 있다. 한국전쟁의 숱한 전투 중에서도 유독 이 싸움을 ‘기적의 전투’로 꼽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였다. 전시 상황은 급박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UN 연합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당시 경기도 가평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횡성-원주-춘천까지 내려온 중공군이 가평을 차지하면 수도권과 서울로 가는 길목이 뚫릴 참이었다.
 
미군 213포병대대원들이 포격과 사격을 하고 있다. 중공군과 싸울 때 240명은 총격전과 백병전까지 치렀다.

미군 213포병대대원들이 포격과 사격을 하고 있다. 중공군과 싸울 때 240명은 총격전과 백병전까지 치렀다.

  
 미군 213 야전 포대는 가평의 산악지대를 지키고 있었다. 앞에서 싸우는 국군을 위해 105밀리 곡사포로 지원 포격을 했다. 남춘천에서 가평으로 산을 타고 넘어오는 중공군을 막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포대가 지원하던 한국군 부대가 아무런 통지도 없이 후퇴해 버렸다. 포대와 적군 사이에 있어야 할 보병 부대가 사라진 셈이다.  
 
졸지에 213포대는 고립됐다. 보병 지원도 없이 중공군을 직접 맞닥뜨렸다. 5월 26일 밤, 본부포대 360명과 A포대 240명이 있는 미군 진지로 중공군 4000명이 진격해 왔다. 숫자로 보면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더구나 A포대 240명은 소총 사격에다 백병전까지 치러야 했다.  
 
당시 포대를 지휘하던 프랭크 댈리 중령은 근접 전투를 위해 포격 방식을 바꾸었다. 포탄의 신관 폭파 시간을 0.5초로 설정했다. 그럼 포탄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적의 머리 위 공중에서 터졌다. 중공군에게 치명적 피해를 줬다. 1개 포대가 1개 사단 규모의 적군을 근거리에서 물리칠 수 있었던 전술적 비법이었다.  
 
가평 전투를 이끈 지휘관 프랭크 댈리 중령.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그의 노련한 전술 덕분에 213포병대대가 중공군 1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가평 전투를 이끈 지휘관 프랭크 댈리 중령.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그의 노련한 전술 덕분에 213포병대대가 중공군 1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213 포병대대가 포사격을 하고 있다. 대대원들은 모두 유타주 출신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213 포병대대가 포사격을 하고 있다. 대대원들은 모두 유타주 출신이었다.

 
전투는 밤새 계속됐다. 양쪽의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은 밤새 협곡을 밝혔다. 동이 트고 나서야 총소리가 잦아들었다. 중공군은 후퇴했다. A포대 레이 콕스 대위는 9명씩 2개 조를 편성해 협곡으로 정찰대를 보냈다. 중공군 전사자는 350명이었다. 협곡에 남아 있던 중공군은 미군 정찰대를 보자마자 소총을 내려놓고 항복했다. 생포한 중공군만 830명이었다. 600명의 미군이 4000명의 중공군을 격퇴한 대승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도 있었다. 격전을 치렀음에도 213포대의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가벼운 부상자만 서너 명 있을 뿐이었다. 포격뿐 아니라 총격전과 백병전까지 치렀는데도 말이다. 누가 들어도 믿기지 않는 전과(戰果)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지금도 ‘기적의 전투’라고 부른다.  
 
213포대 부대원들은 협곡 곳곳에 흩어져 있던 중공군 전사자의 시신을 모두 거두어 땅에 묻어주었다. 그걸 본 중공군 포로가 미군에게 “죽은 사람들을 묻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이들의 눈에는 비록 적이지만, 중공군도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밤새 이어진 가평 전투는 새벽에 동이 트자 멈추었다. 중공군은 후퇴했고, 협곡에 남아 있던 중공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밤새 이어진 가평 전투는 새벽에 동이 트자 멈추었다. 중공군은 후퇴했고, 협곡에 남아 있던 중공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그해 12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213포대에 대통령 표창을 주었다. ‘기적의 전투’에 대한 치하였다. 지휘관 프랭크 댈리 중령은 미국 정부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미국 한국전쟁 참전 및 가평 전투 70주년 기념식’ 행사를 주관한 국제봉사단체 한국헬핑핸즈 오희근 이사장은 “한국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은 유엔군 전사자가 5만4000명이다. 그중 68%가 미군이다. 미군 사망자(3만7000명)와 실종자(3700명)는 4만 명이 넘는다. 부상당한 미군만 9만2000명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주요한 혈맹 관계”라며 “미국 유타주 시더시는 매년 이 기적의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우리도 대한민국의 자유가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내년부터는 국가보훈처가 참전 기념행사를 주관하기를 건의해 놓은 상태다.  
 
가평 전투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한국과 미국의 참전용사 후손들이 함께 애국가와 미국 국가를 번갈아가며 부르고 있다. 브래드 테일러의 부인 앤 테일러 여사가 지휘하고 있다.

가평 전투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한국과 미국의 참전용사 후손들이 함께 애국가와 미국 국가를 번갈아가며 부르고 있다. 브래드 테일러의 부인 앤 테일러 여사가 지휘하고 있다.

 
6일은 현충일이다. 가평 전투 기념비 왼편 바위에 영어로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그건 70년 세월을 관통하며 울리는 역사의 메아리였다.  
 
가평=글ㆍ사진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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