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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명함에도, 치킨집 간판에도…칠곡할매들 손글씨체 인기

중앙일보 2021.06.02 00:03 16면
칠곡군 여러곳에 붙어 있는 각종 현수막들. 시쓰는 칠곡할매 5명의 손글씨로 만든 칠곡할매글꼴로 제작돼 눈길을 끈다. [사진 칠곡군]

칠곡군 여러곳에 붙어 있는 각종 현수막들. 시쓰는 칠곡할매 5명의 손글씨로 만든 칠곡할매글꼴로 제작돼 눈길을 끈다. [사진 칠곡군]

한글을 막 깨친 시골 할매들의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만든 ‘칠곡할매글꼴’이 인기다. 명조체·궁서체처럼 워드 프로세서에 공식 탑재되고, 국립박물관 유물로도 인정받았다.
 

원작자 이름 붙인 다섯 종류 서체
주요 문서작성 프로그램에 탑재
지역 내 거리 현수막·간판에 사용
유물로 지정, 국립한글박물관 보전

칠곡할매글꼴은 지난해 12월 뒤늦게 한글을 깨친 할머니 5명의 손글씨체다. 칠곡군은 글씨체 원작자 이름을 붙여 칠곡할매 권안자체·이원순체·추유을체·김영분체·이종희체 등 5가지 글꼴로 제작해 무료 배포(www.chilgok.go.kr) 중이다. 칠곡군은 1일 “한글과 컴퓨터(한컴오피스) 2021년도 버전에 5가지 칠곡할매글꼴이 모두 탑재됐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최근 국립한글박물관의 유물로도 공식 지정돼 USB에 담겨 영구보존된다. 심동섭 국립한글박물관장은 “정규 한글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가 남긴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이라고 했다.
 
칠곡군수는 5명의 칠곡할매글꼴로 다섯가지 명함을 만들어 가지고 다닌다. [사진 칠곡군]

칠곡군수는 5명의 칠곡할매글꼴로 다섯가지 명함을 만들어 가지고 다닌다. [사진 칠곡군]

칠곡할매글꼴은 바탕체 같은 유명 글꼴로 주로 만들어지던 각종 게시판·표지판의 글꼴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최근 경북 경주 황리단길에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대형 글판이 내걸렸다. 해병대교육훈련단 앞엔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입대 환영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한글 전용 박물관은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표구를 상설 전시 중이다. 식당 메뉴판 글씨로도 활용 중이다.
 
경북 칠곡군 로얄사거리·회전교차로 등 지역 주요 거리에도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다양한 현수막과 표지판이 부착돼 있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아예 칠곡할매글꼴 5개로 각각 제작한 다섯 종류의 명함을 쓴다.
 
칠곡군 왜관읍에서 치킨전문점을 운영하는 신혜경(39)씨는 “칠곡할매글꼴로 작성한 감사의 글을 치킨 배달 상자에 붙인다”며 “다른 글꼴보다 칠곡할매글꼴이 진심 어린 마음을 전달하기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개성있는 손글씨로 다섯 종류의 칠곡할매글 꼴까지 만든 칠곡 할매 5명. 자신의 손글씨가 쓰인 푯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칠곡군]

개성있는 손글씨로 다섯 종류의 칠곡할매글 꼴까지 만든 칠곡 할매 5명. 자신의 손글씨가 쓰인 푯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칠곡군]

어린이가 쓴 듯한 글씨 모양인 칠곡할매글꼴은 할머니들이 지난해 하반기 한 명당 종이 2000여장에 글씨를 써가며 서체 만들기에 정성을 기울여 세상에 나왔다. 시골 할머니들이 하기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유독 할머니들을 힘들게 한 건 영어와 특수문자였다. 이때 손주들이 지원군으로 나섰다. 손주들이 옆에서 할머니 서체 만들기를 도왔다. 유명인이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시골에 사는 할머니들의 손글씨가 서체로 만들어진 것은 처음이다.
 
칠곡할매들은 시 쓰는 할매로도 유명하다. 이런 시들이다.
 
‘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 -소화자 할머니의 ‘시가 뭐고?’ (2015년 10월 1집 『시가 뭐고?』 수록)
 
‘나는 백수라요/묵고 노는 백수/콩이나 쪼매 심고/놀지머/그래도 좋다.’ -이분수 할머니의 ‘나는 백수라요’ (2016년 10월 2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수록)
 
시 쓰는 칠곡할매들은 지난해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로도 알려졌다. 칠곡할매글꼴은 이런 시 쓰는 할머니 중에 손글씨에 개성이 있는 할머니 5명의 글씨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칠곡할매글꼴은 특별한 의미와 개성으로 한글 사용자들에게 또 다른 기쁨과 만족을 줄 것”이라며 “맹활약 중인 할매글꼴을 더 많이 이용해달라”고 말했다.
 
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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